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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텐츠스튜디오H Apr 01. 2020

나는 아직도 악몽을 꾼다

갑질로 퇴사한 후, 10일 동안의 시간 

퇴사만 하면, 가해자만 마주치지 않으면 끝나는 줄 알았다 

이 일을 겪게 된 후 가끔 꾸는 악몽이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지만 그건 분명 가해자였다. 중학교 때 나는 늘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는데 그 자리에 가해자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내 자리에서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옆에서 다른 친구들이 자리 좀 비키라고 같이 이야기 하지만 구부정한 뒷모습의 가해자는 끝까지 앉아 있다. 그렇게 한참을 화내다 새벽에 잠에서 깨는 것이다. 

이렇게 꿈을 꾸면 그 날의 컨디션은 엉망이 된다. 아무리 맛있는 밥을 먹어도 뷰가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도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산책을 해도 꿈속에서 느꼈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나는 퇴사 10일이 다 된 지금도 저런 끔찍한 꿈을 꾼다. 갑질이 주는 상처는 생각보다 크고 깊었다.  


차라리 한 대 맞을 걸 

몇몇 사람들의 말대로 맞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상처를 남기고 진단서라도 끊어서 병원에 누워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게다가 상처가 낫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멀쩡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간단한 업무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엉뚱한 분노를 쏟아내고 퇴근길에 '트와이스의 feel special'을 들으면서도 울어버리는 상태였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가해자한테 매일매일 맞아 온 감정들이 이제야 서서히 곪아 터지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상처들을 외면해왔고 아프지만 애써 버텨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이유도 에너지도 없었다.  

퇴사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히자마자 국장을 비롯해 퇴사를 만류하기 위한 설득이 시작되었다.   


가해자가 사과할 의향이 있다는데 받아주고 계속 있으면 안 될까요? 

내가 들었던 설득의 멘트들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가해자의 사과. 가해자는 나에게 함부로 사과를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사과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나는 준 적이 없었다. 가해자는 사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한테 사과를 받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건 나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었다. 게다가 조직에서도 가해자의 사과를 받았으니 더 이상 문제 제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설득한다고 면담을 하는 사무관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끝까지 사람들은 내가 입은 이 상처를 알지 못했다. 차라리 팔이라도 부러졌으면, 이마라도 깨졌으면 그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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