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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텐츠스튜디오H Mar 30. 2020

피해자다운 모습

또 다른 가해자들의 익숙한 함정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거예요.

힘든 건 아는데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질이라기보다는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어디 맞은 것도 아니잖아요?

여자분들이라 좀 예민한 거 아니에요?

그냥 술 한잔 먹고 풀어요.

갑질이 아니라 을짓하는 것 같은데.

나도 전에 그런 상사가 있었는데 그냥 잘 맞춰주면서 있었어요. 그렇게 해봐요.

그래도 상사인데 신고하는 건 좀...

다시는 공무원으로 일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신고 이력이 있으니까..


위로인지 질책인지 애매한 말들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저 업무 중에 발생한 상사와의 갈등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고통은 누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통은 나 혼자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였다.

게다가 내가 여자라는 것이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약점이 되기도 했다.

‘남자들 같으면 그냥 술 먹고 풀어도 될 일인데 여자라서 더 예민한 것 같다’

내가 갑질 피해를 당했다는 데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왜 거론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무원 조직에서는 갑질 피해 사실보다 나의 업무 능력보다 나의 성별이 더 중요했다.


'갑질 피해자 맞아? 일하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

그리고 분위기 흐릴까 봐 애써 웃으며 인사했던 노력들이, 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묵묵히 일했던 모습들이 ‘피해자답지 않다’며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었다.

나는 나의 약해져 있는 모습들을 드러내기 싫었다. 나의 우울과 슬픔과 분노를 드러내기가 두려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이 나의 이성을 갉아먹는 게 싫었다.

갑질로 신고한 피해자가 아닌 열심히 일 잘하는 사람이고 싶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가해자에게는 가산점이 되어 버렸다. 가해자는 본인이 모함을 당한 것처럼 하루 종일 의기소침해 있었다. 연가와 병가를 번갈아 쓰고 매일 바르던 빨간 립스틱도 바르지 않았다.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심지어 가해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울기도 했다. 이런 가해자의 모습에 사람들은 '진짜 뉘우치고 있는 것 같다, 사과할 의향이 있어 보인다'라고 생각했다.

몇 십억의 국가 예산을 다루는 공무원들조차 가해자의 이런 모습에 설득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가해자의 모습이 이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의 논리와 증거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조직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점점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감사실의 조사 과정에서 이어졌던 상황들 또한 가해자의 폭력만큼이나 나에게 큰 상처를 안겨줬다. 가해자가 써낸 문서에서 나는 정말 무능력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설명이 되어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강한 한 방이었다. 가해자가 했던 그 어떤 폭언들보다 나를 분노하게 했다. 나에게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냥 나는 내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 1년 여 동안 내가 했던 업무들을 울면서 문서로 작성해서 제출했다. 가해자의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내가 증명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가해자는 나의 업무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이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가해자의 업무 지시에 어떻게 해서든 따라가려고 했었다. 나의 업무 방식이 맘에 안 들면 그에 대해 질책을 할 수도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가해자는 오로지 나에 대한 비난, 그것이 목적이었다. 과연 가해자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가해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이었다.  

나중에 조사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 조사 담당자는 가해자가 조사과정에서 80% 이상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 거짓말에 대한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무원 조직은 이런 곳이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거짓말로 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더라도 나만 안전하면 되는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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