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다 보니 밥을 먹을 때면 예능을 틀곤 한다. 평상시에 워낙 진지한, 엉뚱한 성격이라서 늘 생각이 많은데 예능을 보면 뇌가 회복되는 느낌이다. 작년에 한참 재밌게 봤던 <스우파>에 이어 요즘은 <유퀴즈>를 보고 있다.
불과 2년 전, 코로나19가 없었을 때는 유재석 씨와 조세호 씨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퀴즈를 푸는 게 <유퀴즈>의 방송 목적이지만, 그저 방송을 위한 명목일 뿐 시민들의 소소하고 담대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게 제작진의 목표였나 보다.
어제는 뭔 감성이 터졌는지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다시 찾아봤다. 뇌리가 아닌 가슴에 담길 정도로, 그 어떤 책보다 울림이 있던 사람들의 리얼 이야기.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밥을 먹으며 눈물을 훔쳤다.
베스트 셋을 링크 걸어 두니, 누구든 밥을 먹으면서 틀어보길 권유한다. 밥이 따뜻해서인지, 마음이 따뜻해서인지 세상 모든 게 아름답고 소중해 보이는 경험을 할 것이다. (밑에 글 더 있음)
이 사연들을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내가 아는 보편적인 사회와는 도무지 결이 맞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보편적인 사회라 함은, 그 누구보다 빠르고 완벽하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하고, 타인보다 나를 먼저 위하는 게 당연한 도리이며, 어떤 순간 앞에서는 관계를 접기도 하는 모습을 말한다.
나 역시 그랬다. 또래들보다 발이 넓은 편이고, 욕 하나 못할 정도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착하게 사는 편이지만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는 한순간 이기적을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모두가 그런 줄 알았고, 보편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나를 위해 티를 내지 않고 자신을 묵묵히 희생해가며,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조용히 숨결만 내뱉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Dot'처럼, 그런 사랑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번 설날에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한 가지를 바로잡았다. 초등학교 6학년, 전교회장이 된 나는 학교에 가는 게 영 편치 않았다. 재래식 화장실이 딸린 판자촌에 살 정도로 가난했던 탓에, 학교에는 어떤 재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부회장이라는 녀석이 대놓고 나를 힐난했는데, 그에 대한 분노보다는 그를 동조하는 녀석들을 보았기에, 당연히 내가 잘못한 것 마냥 시선을 피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부모회는 집에 전화를 걸어 수학여행 때 찬조를 하지 않느냐며 나무라 했었고, 야금야금 눈치를 주던 선생님들까지도 아직 또렷이 기억한다. 찬조는커녕 수학여행비가 없어 당장 내가 수학여행을 가지 못할 판국인데 어쩔 도리가 있나.
30대가 된 나는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교 회장의 재정적 지원이 관례였다면, 당연하다고 여기던 일종의 문화가 나로 인해 파괴되는 셈이었을 테니 그들은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소리쳤던 것이다.
그중에 교감선생님의 호통이 가장 무섭고 야속했다. 라이브로 송출되던 교내 방송을 제대로 연습하지 않아 두 번 방송을 한 날에는, 유독 쓴소리를 내뱉으셨다. 그게 얼마나 심했냐면 나보다 한 살 어린 5학년 여자 후배가 몰래 다가와 "원래 저러신대."라고 위로해 줬었다.
나는 그런 호통이 앞선 이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눈치를 주는 것이라고. 나 하나로 학교의 1년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화를 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 설날에, 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시며 그간의 생각이 뒤바뀌었다. 아버지는 딱 한 번 학교에 찾아오셨는데 나는 선생님들과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것만 알았지,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을 쭉 들이켜시더니 살면서 그때가 가장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학교에 불려와 행정실에 들어서자, 한쪽에는 '몇 회 전교회장 *** 기증'이 쓰여있는 괘종시계가 있었고, 뒤쪽에는 역대 전교회장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행정실에는 몇 명의 선생님들이 계셨다는데, 주위 풍경을 떠올리면 아버지께서 어떤 위압감을 느끼셨을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의자에 앉자, 그중 가운데 계셨던 교감선생님께서 먼저 말문을 여셨다고 한다.
"한이가 공부도 잘하고 성실해서 다른 학생들한테 모범이 돼요. 인기도 많은지 투표가 월등히 높았어요. 아버님. 힘들다고 한이가 전교회장 하는 걸 되돌릴 순 없어요. 다른 건 생각하지 마시고, 한이가 끝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세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못된 교감선생님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나를 살리기 위해 묵묵히 행동하셨던 모습이 그려졌다. 눈치를 주는 것이라 여겼던 호통은 도리어 회장으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엄하게 가르치신 것이었다.
선생으로서 제자의 1년을, 학부모회와 다른 선생님들 사이에서 홀로 강단 있게 다독여 주신 마음. 나는 알게 모르게 이런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랑보다, 모르게 받아온 사랑이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게 아니라, 사랑이 나를 살아오게 한 것이다.
사람은 어째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일까. 교감선생님과 아버지의 마음은 내가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유퀴즈>에 나온 한 분 한 분의 사연이 모두 따뜻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만한 사랑을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미리 내가 상대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나눴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후회가 되는 순간이다. 언젠가는 나 또한 누군가의 Dot이 될 수 있도록, 주어진 순간에 온전히 사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