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2주가 지났다.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라는 설렘이 벌써 식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차를 마시며 뉴스를 듣고, 환율을 체크한 뒤 업무를 시작. 은 개뿔. 어떻게든 눈을 뜨지만 간단히 눈곱만 떼어내도 어느덧 9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오늘은 더구나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전 애인의 사무실 앞을 지나왔다. 길목에 있는 터라 피할 수가 없었다. '간판이 바뀌었네. 멀끔하게.' 점심을 배만 채우는 형식으로 해치우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몇 번을 끄적이다가 접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전 애인이 잘 지내는지부터 시작해서 왜 헤어졌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보다 여지는 있던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이 터졌다. 일이 잡힐 수가 있나. 인터넷에서 연애나 이별에 관한 글과 영상을 보다가 '아 헤어지는 사람들 참 많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니. 상대가 좋은 사람이었기에 저리도 힘들다는데, 그렇다면 세상엔 좋은 사람이 넘치는구나! 어정쩡한 결말에 이른다. 그 결말이 참이라면, 후회는 뒤로 접고 미련보다는 설렘이 있어야 하는데 이별이든 퇴사든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저녁이 될 때까지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축 늘어져 기운 없이 흐물거리다가 책을 집어 들었다. 네 번은 족히 읽은 책.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이었다. 웃기게도 책 표지에는 '걱정이 내 인생을 망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어디 한 번 말해보시게. 네 번이나 읽었지만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1장 1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제와 내일을 차단하는 오늘의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죽어버린 과거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나요?"
아니오. 대답은 쉬웠다. 벌써 몇 개월째 과거에 얽매여 일상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찰나의 선택 하나가 이리도 오랫동안 미래를 쥐고 흔들 수 있다니. 카네기님. 그래서 과거와 단절은 어떻게 하나요? 질문만 하지 말고 답을 알려주세요.
이상하게도 책에는 답이 없었다. 오히려 끔찍하게도 시한부 인생, 2주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편안하게 일상을 살다 보니 해결되었다는 극단적인 사례만 등장한다. 과거가 괴로운 이유는, 바꿀 수 없는 미래에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아있기 때문인데 말이다.
다행인 것은 세상에 훌륭한 어른이 여럿이라는 점이다. 카네기의 질문에 법륜스님의 즉문즉답을 이어 들어 보니,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 "욕심이 많네요. 진정한 사랑은 꺾지 않고 두고 보는 것.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든 바라는 마음을 버리든."
과거가 오늘을 붙잡는 이유는 욕심에 있다고 하신다. 오늘 내가 일을 하지 못한 건 길목에 있던 간판 때문도 아니고, 눈곱을 떼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서도 아니다. '사랑을 다시 이어가고 싶은 욕심' 때문. 상대를 그대로 둘 수 없다면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후회와 미련을 사랑으로 덮어둔 채 탄천을 달리고 왔다. 요즘은 미세먼지가 적어 야경과 달이 아주 멋지다. 밤하늘을 보다 보면 다시금 마음에 지펴지는 설렘. '저 하늘을 누구와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눈을 돌려 다시 달린다. 숨차게 뛰다 보면 힘들어서 온갖 생각이 사라진다.
내일은 퇴사하고 15일째. 이별은 카운팅 하지 않는다. 퇴사든 이별이든 현실이 무겁다면 과거를 단절하자. 마치 회사를 다니지 않았고, 태생이 사업가인 것 마냥. 마치 진정한 사랑은 아직 해보지 않았고, 다가올 사랑을 기대하는 것 마냥. 어떻게 단절하냐고? 나는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