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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Sep 03. 2022

등린이 등록 일지

아침 다섯 시.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겉옷을 걸친다. 씻어둔 방울토마토를 한 주먹 움켜쥐고 집을 빠져나온다. 스터디 카페로 걸으며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입에 넣는 즐거움. 주먹이 비어갈 때쯤 한적한 스터디 카페에 도착한다. [입실하기 - 좌석선택] 버튼을 눌렀을 때 모든 자리가 비어있는 쾌감. 하루가 시작한다.

 



성인이 된 후 첫 등산을 간다. (남산, 남한산성 제외) 익히 들어서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 북한산. 동산보다는 힘들겠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블로그 후기들을 읽어보니 나랑 똑같이 생각했다가 큰코다친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 태양신 말씀대로 장비를 한두 개 사자.


급히 아웃도어 매장에 들렀다. 원체 모르는 분야라 인터넷에서 추천해준 그대로 C사의 S모델 등산화로 직진했다. 전천후 등산화라 그런지 무게감이 딱 적당했다. 만족해하는 찰나 "친구들하고 가시죠? 요즘 젊은 분들은 금방 설악산, 한라산 멀리도 가요. B모델이 더 나을 거예요."


아주머니의 과한 친절은 젊은 남성에게 부담이다. '어떻게 거절해야 하지.'로 직결되는 불편함. 하지만 거절을 하지 못하고 일단 신어 본다. 발목까지 잡아주는 편안함. 정말 안전하려면 좋긴 좋겠다. 하지만 조금 더 무겁고, 무엇보다 가격이 상당했다. 입문자에게는 아니지.


처음 골랐던 등산화를 집에 가져와 옷을 맞춰 입고 신어 본다. 세 달 전에 사둔 전신 거울을 이제야 쓰다니. 이왕 배낭까지 걸쳐 맨다. 거울 속의 남자는 꽤나 등산꾼 같다. 흡족. 뽐은 잠시 내려두고 배낭을 싼다. 내일 잘 다녀와야지.




북한산우이역. 서른 평생 이런 역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에도 몰랐다. 귀엽게도 두 량 밖에 안 되는 미니 지하철. 그 모양이 비엔나 줄줄이 소시지 같아 내 어릴 적 별명이 떠오른다. 역에 다다르자 다른 등산객들과 우르르 내린다. 밖으로 나서니 어느 때보다 높이 멀어진 하늘. 파랗다.


등산로에는 흙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허연 돌을 밟고 걸어야 하는 돌산. 첫 경험이 짜릿하다. 같이 오르는 N형이 앞에서 리드해주신다. 다리가 쭉. 높은 돌도 한 번에 박치고 나가는 모습에 아, 사람은 역시 다리가 길어야 하는구나. 그럴 수 없는 나는 손을 딛고 폴짝 뛰어오른다.


지쳐서 숨 쉬는 것 말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쯤, 거하게 쉰다. 가져온 물을 입에 쏟아부으니 목젖이 위아래로 벌컥벌컥. 500ml를 세 병이나 준비한 보람이 있다. 갈증의 정도로만 봐도 웨이트나 러닝과 결이 다른 운동이다. 젊은 커플들이 등산데이트를 하는 모습에, 세상에나. (둘 중 한 명은 욕하고 있겠지?)


오르다 마주친 얕은 물에서 세수를 한다. 찬 물이 얼굴에 닿고, 그 물이 시원한 바람에 날아가고. 이 쿨감은 냉장고 문을 열고 얼굴을 안으로 들이 넣었을 때, 그 쿨감보다 상쾌하다. 이래서 산에 오르는구나. 정상에 다다르자 그 높던 하늘이 아직도 높다. (이렇게 올라왔는데?) 밑으로는 초록이 가득하다. 능선들이 얼마나 멋있던지, 서울 도시를 초록 바다가 넘실 거리며 지나가는 듯하다.


바위에 앉아 가져온 과일을 꺼낸다. 다행히 N형은 사과와 오이, 나는 방울토마토, 겹치지 않았다. 수국차를 한 모금, 입 안에 생기가 돈다. 그제야 알아차린 내 위치. 하늘과 땅 사이 딱 중간에 앉아 있다는 묘한 신비감. 시력 2.0의 탁월한 시각부터 시작해 모든 감각이 살아난다. 내가 곧 신선.


하산은 쉬지 않고 한 시간 반.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파발로 이동해 편육과 막국수를 주문했다. N형과 두 시간가량 각자의 회포를 푸니 이 또한 행복이다. 하루에 힐링 포인트가 몇 개나 되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렸다. 일반쓰레기, 재활용쓰레기, 음식물쓰레기, 비닐까지. 일주일에 한 번, 모든 걸 다 내다 버려도 되는 날이다.


잠자리에 누워 '등산도 요일이 정해져 있다면 정기적으로 노폐물을 버릴 수 있을 텐데, 산에 사는 사람들은 맨날 버리는 셈이네, 나도 산 밑으로 이사갈까...' 이런 잡다한 생각들을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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