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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Aug 27. 2022

내일도 꼭 오늘만 같아라

모처럼 토요일 약속이 취소되니 시간이 비었다. 할 것은 많았지만 평일에 힘을 다 쏟아부었으니, 뭐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닥에 벌러덩 눕자마자 들리는 냉장고 소리. 이유미 카피라이터가 쓴 <문장수집생활>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냉장고 청소는 그야말로 복잡한 생각을 없애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정말일까 궁금해 사진까지 찍어 두었던 이 문장이 떠올라서 냉장고 문을 활짝 열었다.



이상하게도 냉동실은 멀쩡한데 냉장실 안쪽 벽에 성에가 끼어 있었다. 실은 요즘 고민이 많은 친구에게 도움을 주려고 냉장고를 그대로 둔 채 저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었다. '청소하는 동안만 잡생각 없어지는 거면 가성비 하타치네"라는 친구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 다음 장엔 이런 문장이 쓰여있다. "이따금 정신 차리는 게 중요한 일이다."



나도 정신 좀 차릴 겸 냉장고 코드를 뽑고 음식을 싹 꺼냈다. 두 시간이 지나도 성에가 퍽 녹지 않아 헤어드라이어로 바람을 불었다. 30분 정도 걸레와의 물전쟁을 치르고 나니 냉장고가 깨끗해졌다. 콰, 이렇게 두 시간 반이 지나가다니. 정리된 냉장고는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냉장고를 채우자.


먼저 다음 주 식단표를 세웠다. 먹는 걸 계획하다 보니 은근히 건강하게 먹고 싶다는 욕심이 솟아난다. 새벽은 샐러드, 아점은 볶음밥, 점심은 김에 밥을 싸 먹어야지. 계란이나 두부, 무말랭이가 같이 있으면 좋겠다. 저녁은 닭가슴살과 바나나로 해치우고 12시간 공복을 유지해보자. (어이없게도 새벽 다섯 시면 배가 고파 눈이 떠지는 편이므로 5시, 9시, 13시, 17시. 이렇게 네 번 밥을 먹게 된다.)


마트와 과일가게를 코스로 방문한 뒤, 동네 정육점 앞을 지날 때였다. '100g에 1300원' 종잇장에 내걸린 가격이 눈알을 훔쳐간다. 뭔 고기가 저렇게 싸지? 호기심이 차오를 때쯤, 이미 몸은 고기 앞에 놓여있다. 훤칠한 아저씨가 "오늘은 살치살이 좋아요."라고 말하신다. 눈알만 살치살 가격표로 이동. 놓여있는 고기 중에 제일 비싸다. 1300원 고기가 대체 무슨 고기인지 물어봐야 하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옆에 있는 치마살 한 팩을 샀다. 262g에 23580원.


충동소비를 했지만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집 문을 여니 벌써 오후 네 시. 그대로 치마살을 살짝 구워 맛을 본다. 황홀함에 번뜩, 아까 냉장고를 청소할 때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봤었다. 언젠가 한 번 먹고는 냉장고에서 용케 살아있는 녀석이다. 그렇게 치마살과 정육점 아저씨가 덤으로 주신 파채, 그리고 자신 있는 요리인 양파 볶음을 7분 만에 만들어 식탁을 차렸다.



저녁을 먹고는 집안에 나뒹구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널브러진 책들과 운동할 때 쓰는 스트랩. 케이블이나 빵 봉지를 묶는 끈은 왜 이리 많은지 싹 모아 공구통에 넣었다. 옷장을 열었다. 대충 접어서 넣어둔 옷들을 꺼내 칼각을 맞춰본다. 평소에 입는 옷은 몇 장 없는데 흐물흐물한 러닝복은 좀 있다. (그마저도 살이 쪄서 다 작다.) 오랜만에 달리기나 해 볼까. 


몸매 중 뱃살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러닝복을 입고 탄천을 달렸다. 달리기를 하면 눈앞에 있던 사람이 3초 만에 사라지기 때문에 뱃살이 창피하지 않다. 이 옷은 달릴 때만 입는 걸로. 몸을 슬쩍 풀고 발을 내딛는데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몇 걸음 떼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파란 하늘. 그 끝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햇살이 이마에 가득 붙으니 에너지가 충전되는 날씨다. 물길을 보듬어 쫙 펼쳐진 초록 풀들 사이로 벌레들이 재잘거린다. 초록과 노랑이 만나 하늘이 더 푸른가 보다.


오늘 코스는 송파구 쪽 탄천에서 시작해 강남구로 넘어갔다가 다시 탄천 다리를 건너 송파구로 돌아온다. 약 4km 남짓. 휴대폰과 시계를 집에 두고 왔으므로 기록은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달린다. 다리 위에 오르자 차들이 신호에 걸려 멈춰있다. 아, 이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이 나밖에 없네. 선팅된 차창 사이로 왠지 나를 구경하고 있을 것 같아 (바른 자세가 뭔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바른 자세로 보이도록) 신경 써서 달린다. 그러다 내려다본 탄천.


햇살이 물 위를 쪼르르 굴러간다. 윤슬이라는 소리가 참으로 알맞다. 풀들이 이뤄낸 물길은 규칙 없이 굽어져 있고, 그 옆으로는 사람들이 달리고, 자전거를 타고, 사진을 찍는다. 높은 건물들은 풍경의 배경이 되었다. "하, 힐링이다." 내일도 꼭 오늘만 같으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다리를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더 이상 뛰질 않으니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점점 또렷이 보인다. 3초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 어쩌다 눈이 마주치자 '눈 안 마주쳤어요. 갈 길 그냥 가셔도 돼요.'라는 듯이 서로 시선을 급하게 옆으로 돌린다. 그렇게 앞을 보지도 않고 몇 걸음을 더 걸어 사람이 사라지자 '아, 내 뱃살!' 황급히 숨을 참아 배를 홀쭉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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