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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Oct 08. 2022

밤에 15초만 기다리면 보이는 것


부산 여행 중 첫 직장 동료이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가족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며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었다. 죽마고우 같고, 나도 도움을 몇 차례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히 도와주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을 참이었다. 그런데 휴대폰 너머로 이 친구가 전화를 걸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그 생각의 무게가 느껴졌다.


"야! 괜찮지?" 혹시나 싶어 던진 질문에 몇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고 지낸 13년 만에 처음으로 이 친구의 눈물을 느꼈다. 술집으로 이동하던 걸음을 멈추고 거리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동창 친구들이 모였다. 그래 봐야 세 명이지만 자주 못 보는 셋이 모이니 별 얘기를 다한다. 연애 얘기, 과거 연애 얘기, 그보다 더 과거 연애 얘기. 연애 이야기가 주요 소재였지만 2차, 3차, 4차, 술을 달리며 일결혼 같은 미래 얘기들로 이어졌다. 택시를 타러 가는 길, 어느 이야기 끝에 친구의 질문이 날아왔다. "퇴사하고 잘 살고 있지?"


뜬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어릴 때부터 모험적인 선택만 연거푸 해오던 나에게 '잘한다'는 것은 도전 하나 전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도전은 '잘못'이 되었고, 무엇을 수성하고 있는지가 '잘한다'의 기준이 되었다.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내가 모른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학창 시절엔 성적이 나를 증명했고, 회사를 다닐 땐 평판이 나를 대변했다. 퇴사 후 창업, 홀로서기를 한 시점부터는 아무것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밤 11시. 스터디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잠이 몰려와 산책을 나섰다. 다행히 근처에 넓은 공원이 있어서 한 바퀴 걷고 오면 몸이 개운해진다. 공원에 도착하자 지상의 불빛들이 줄어들었다. 은은한 가로등 사이로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앞이 트여 시선 끝에 하늘이 걸친다. 자연스레 보게 된 오늘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22년 10월 8일. 목성과 달이 나란히 위치한 날이다. 보름달 옆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고 하얀빛을 보란 듯이 내비치는 별빛이 목성이다. 그로부터 왼쪽으로 세 뼘 정도 이동하면 붉은빛이 하나 보인다. 화성이다. 거기서 다시 왼쪽으로 반 뼘을 재보면 적당히 밝은 별 하나, 1등성 카펠라가 있다. 카펠라를 한 꼭짓점으로 육각형을 그리면 그게 마차부자리.


밤하늘을 15초만 바라보면 없던 줄 알았던 별들이 눈에 속속 들어온다. 오늘처럼 비 온 다음 날에는 보름달이 무색할 정도로 별들의 무대가 펼쳐진다. 마차부, 백조, 카시오페아, 황소, 작은곰. 먼지와 구름이 걷히자 평소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빛나는 것이다. 별들은 항상 제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Emile님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스타 나라에 명량, 자랑, 긍정의 이상적인 낙원이 존재한다면 브런치 나라에는 노여움과 슬픔이 있다. / 인간은 희, 노, 애, 락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 말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든 힘든 감정에 직면할 때가 있다. 기죽지 말자. 앞 날을 모르겠다고 두려워하지 말자. (다행히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브런치 나라가 있다.)


부산에서 통화한 친구에게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한 페이지를 공유하고 싶다.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입시험에서 겪은 실패 앞에서, 19살의 남자가 갖고 있던 소원은 아주 뚜렷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껴지게 해 주세요."

잠에서 깬 남자는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후회 없이 공부한 1년과 좋은 결과가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당시엔 쓰라리게만 느껴졌던 경험들이,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남자의 형태를 다른 사람과 다른 모양으로 잡아나가는 밑 작업이었다. 남자는 부딪혀서 깨지고 갈려 나가더라도 그 밑에 남는 조각이 결국에 어떤 모양으로 완성될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힘껏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남자에게 필요한 주문은 딱 하나였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526p


* Emile님의 글 : https://brunch.co.kr/@e-plan/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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