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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Jun 12. 2022

심심하고 무료해도 이대로가 좋다



햇살은 곱고 화사하고 바람은 선선하다. 봄은 눈치만 보다 슬그머니 가버리고 여름이 채 오지 않았는데 가을바람처럼 공기가 차다. 하얀 꽃이 만발한 마가목 나무 아래에 있는 그네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본다. 뭉게구름이 여기저기 두둥실 흘러가고 까치와 까마귀가 전봇대 위에서 깍깍 대기도 하고 마당에서 놀기도 하는 한가로운 오후이다. 가지런히 정돈된 잔디밭 왼쪽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에 참새가 날아와 무언가를 쪼아 먹고 간다. 마가목 나무 꽃과 라일락 꽃 향기가 바람 따라 풍겨온다.


때를 알고 피어났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떨어지는 꽃은 미련도 후회도 없는 듯하다. 올해는 사과나무 꽃도 앵두나무 꽃도 안식년을 맞았는지 몇 송이 피다가 말고 이파리만 무성하다. 꽃도 없는데 벌들만 바쁘게 들락거리는 게 혹시 나뭇 속 어딘가에 아무도 몰래 벌집을 지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벌들이 유난히 많아 우연히 들여다본 앵두나무 가운데 가지에 주먹만 한 벌집을 찾아낸 적이 있다.


부엌으로 통하는 층계 옆에 있는 앵두나무라서 벌집을 그냥 놔두면 벌들이 오고 가다가 부엌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많았다. 벌집을 잘못 건드리면 벌 들이 난리를 치기 때문에 벌집을 건드리기 전에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대문을 열어놓았다. 도망갈 준비를 하고 남편이 벌집을 건드렸는데 그 안에 있던 여왕벌이 화가 나서 남편을 쫓아오기 시작하였다. 벌이 끝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도로까지 도망갔던 날이 생각난다. 하찮은 미물도 자기가 사는 집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하여 복수하는 것을 보면 벌들의 지능이 상당히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집을 짓지도 않았는데 벌들이 바쁘게 다닌다. 해마다 꿀을 빨던 생각을 하고 날아온 벌들이 꽃을 찾는 거 같다.


3주 전에 텃밭에 뿌린 씨가 싹을 내놓는다. 상추 쑥갓 호박이 세상 구경을 하러 나오고 친구가 가져다준 깻잎 모종도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며칠 열심히 물을 주면 따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는 완두콩 씨앗을 사다가 심었는데 엄지 손가락만큼 자라서 좋아했는데 무언가가 꼭지를 따먹어 자라지 못한 채 서 있으니 조만간 뽑아버려야 할 것 같다. 새들이 많이 오는 집이기 때문에 새들이 먹었으려니 하고 말았다.


눈이 하얗게 온 초봄에 파랗게 자라나는 파가 벌써 씨가 생겨났다. 파 값이  금값이라서 파를 몇 단 사다 이파리만 잘라먹고 뿌리를 땅에 심었는데 거름이 좋아서 인지 봄내 잘 먹었는데 씨가 생기니 그것도 갈 때가 되었나 보다. 어디서 날아온 개망초 가 여기저기 뿌리를 내려 주인 행세를 하며 잘 자란다. 장미나무는 작년에 벌레 때문에 말라비틀어졌는데 올해는 아주 건강하다. 장미 꽃망울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모습이 이삼일 사이로 예쁜 장미꽃이 필 것 같다.


장미꽃 앞으로 라일락 나무가 한창 예쁘게 꽃을 피더니 시들어 가지만 아직도 은은한 향기로 사람을 끈다. 그 옆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쁜 연 보라색 꽃이 앞서고 뒤서며 열심히 피어나고 있다. 몇 년 전 지인이 선물로 갖다 주었는데 여름 내내 피고 지고 나면 다음 해 봄에 더 많이 퍼져서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작년에 꽃을 피웠던 소나무가 올해는 송화가 엄청 많이 달려서 노란 꽃같이 예쁘다.


심심한 토끼가 앞뜰에 앉아 있다. 가까이 가도 꼼짝 하지 않는 게 저를 해치지 않는 주인임을 아는 것 같다. 뭉게구름이 해를 가렸다 말다 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살짝 졸음이 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지금이 좋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스트레스 없이 편안한 삶이다. 퇴직한 직후에는 일하던 습관으로 가만히 있지 않고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소일했는데 지금은 노는 것에 적응이 되었다.


급한 것도, 서두르는 것도 싫고 시끄러운 것도 번잡스러운 것도 싫다. 심심하고 무료한 듯해도 그게 좋다. 뜰에 나와 앉아서 아무런 생각 없이 흐르는 구름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욕심 없이 산다. 누군가를 만나도 좋고 혼자 있어도 좋은 평화로운 날이다. 남편과 같이 앉아 지난날들을 이야기하며 한낮의 평화를 누린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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