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오늘도 지나면 그리워진다

by Chong Sook Lee



폭염이 계속되더니 드디어 오늘 새벽에 비가 내린다. 비가 잠깐 내리고 지나가서 이게 뭐야 하고 있는데 하늘이 얕게 내려앉더니 다시 비가 내린다. 차분하게 내리는 게 오랫동안 내릴 것 같다. 비를 기 다린 자연이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30도가 넘는 계속된 폭염으로 누렇게 타들어 가던 잔디가 파랗게 살아난다. 바짝 말랐던 도로가 순식간에 젖고 빗물이 도로를 따라 흐른다. 변덕 심한 하늘이 마음을 바꾸고 구름을 걷기 시작한다. 검은 구름이 서서히 없어지고 파란 하늘이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보여준다. 젖었던 길거리는 허옇게 말라버리고 흐르던 물줄기는 군데군데 고여있다. 목마르던 참에 비를 실컷 마시려던 나무들은 입맛만 다시다 말았다. 그래도 목은 축였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새파란 이파리를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어 본다.


쏟아야 할 비를 품은 하늘은 회색의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와야 할 비가 다 내렸으면 상쾌할 텐데 아주 후덥지근하다. 뜨거운 바람이 지나간다. 어딘가 벼 익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오기 전에 뜨거워야 벼가 잘 익어 풍년이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할 일은 태산인데 날까지 궂으면 농부들의 마음이 심란하겠지만 필요한 비가 제때에 오지 않아 큰일이다. 가뭄이 너무 오래간다. 비가 오지 않아 강이 마르고 논바닥이 갈라지고 있는데 비는 안 오고 날을 뜨거워 걱정이다. 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베짱이들이야 놀고먹으면 하루가 가지만 삶의 전선에서 뛰어야 하는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 갈 것이다.


언제 비가 왔는지 모르게 다시 바싹 마른 잔디를 맨발로 걸어본다. 마른 잔디가 가시처럼 발을 찔러서 따끔따끔하며 아프다. 다시 신발을 신고 걸어본다. 누가 뭐래도 계절이 바뀌고 있다. 매일매일이 영상 30여 도가 넘는 온도로 더위에 견디기 어렵지만 자연은 이미 삶을 포기하고 있다. 내일이면 처서라니 여름내 극성을 부리던 모기가 입이 삐뚤어져서 물지도 못한다. 허리를 숙이고 있는 여러 작물들이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기진맥진 한가보다. 여름내 보라색 꽃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던 이름 모를 꽃나무도 이파리가 누렇게 퇴색하여 말라간다. 사람도 늙으면 저런 모습이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풀들도 기운이 없어 보인다. 씨를 품고 간신히 서있는 채소들이 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파씨가 새까맣게 영글어서 자꾸 땅에 떨어져서 씨를 따서 신문지에 올려놓고 마저 말리고 있다. 갓은 씨가 아직도 통통하고 시퍼렇다.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일찍 익는 생종 사과는 시도 때도 없이 땅으로 떨어져서 온몸이 멍이 들어 드러누워 있다. 한해를 마감하는 모습이 세월이 빠름을 다시 실감한다. 여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미 가을이 와 있다. 인간의 몸도 알게 모르게 늙어가듯이 자연도 삶에 순종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꼿꼿하게 서 있던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가을은 겸손의 계절이다. 살아온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가을은 봄처럼 화사하지 않고 여름처럼 뜨겁지 않고 겨울처럼 삭막하지 않다. 가을은 앞장서지 않고, 나서지 않고, 안으로 삭이며 익어간다. 성미 급한 나무들이 군데군데 물들어가고 생을 다한 나뭇잎이 힘없이 떨어져 세상을 덮기 시작한다. 삶은 겨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가을을 마감하고 겨울을 견디고 이겨내어 봄을 향해 가는 것이다. 햇살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뜨겁게 땅을 덥히고 구름이 비를 막고 있다. 한바탕 쏟아지면 좋을 텐데 망설이고 있다.


유럽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는 극심한 가뭄으로 강물이 말라 간다. 물이 빠진 강에서 오랫동안 잠겨있던 옛날 유적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물 부족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하다. 그런 반면에 뉴스로 본 한국은 너무 많은 양의 비가 너무 자주 오는 올 한 해였다. 과일이 병이 생겨 썩고 물러 제대로 된 과일을 수확하기 힘들어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한다. 한쪽은 가물어서 타고, 한쪽은 장마로 과일들이 익지도 않고 꼭지가 무르니 정말로 쉽지 않은 삶이다. 무심한 하늘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걱정 많은 사람들은 밤잠을 설친다. 사 먹는 사람은 한철 안 먹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농사를 망친 농부들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하루를 살면서도 이런저런 일이 생겨난다. 아침에는 비가 오고 바람 불더니 비가 멈추며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한 해를 살고 한평생을 살다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하늘을 덮고 홍수가 나고 가물어 세상은 몸살을 겪어도 여전히 삶은 이어진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나라마다, 크고 작은 문제로 견디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리고 말 것 같아도 여전히 존재한다. 새로운 계절이 오면 반갑고 가면 서운하지만 또다시 돌아옴을 알기에 기꺼이 보내고 반갑게 맞는다. 뜨거운 오늘도 지나고 보면 기다려지는 아름다운 추억의 날이 된다.


날이 습하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힌다. 아무리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이라 햇볕이 아깝지만 너무 더워서 아무래도 집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지하실은 서늘하다. 얇은 이불이 필요할 정도로 서늘하다. 여름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지하실이 있어 너무 좋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간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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