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ng Sook Lee Mar 15. 2020

익어가자, 천천히 익어가자

상상의 노란 들꽃 (그림:이종숙)


할 일이 없다. 아니다.  일이 태산이다. 그냥 지나치면 보이지 않던 것들도 자세히 보면 엄청나다. 그림 그리고 글 쓰고 돌아다니며 세상 구경이 재미있다고 잊고 지냈던 집안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다. 이리 밀어 넣고 저리 올려놓고 이제는 바닥으로 이것저것 포개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봄이 오면, 가을이 오면 해야지 하며 밀어 놓았던 정리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유행병 코로나 19로 밖의 출입을 줄이다 보니 집에서 무언가 해야 하는데 글 거리며 노는 것도 하루 이틀 마음도 심란한데 집안 정리나 해야겠다. 봄에 한다고 큰소리쳤는데 오라는 봄은 안 오고  눈 오고 춥고 하니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자.

한 달 동안 손주들 보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시간이 갔다. 아이들은 전화를 하여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 한다. 장도 보러 가지 말고 성당도 가지 말란다. 사람들 많이 오는 체육관도 가지 말고 추운데 산책도 감기 걸리면 큰일 니까 하지 말란다. 내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애들이 대장이고 나는 졸병이다. 하라는 것도 많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알아서 했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잔소리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며 저희들 어렸을 때  내가 하던 대로 내게 한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인데 들어보면 아이들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그 나이 때 나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님께도 잘못하고 애들도 저희들이 알아서 큰 것 같은데 요즘 애들은 한마디로 똑 부러진다. 모르는 게 없고 모든 걸 체계적으로 잘한다.

그러니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컴퓨터 시대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아이들은 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모르는 것은 백과사전을 찾아가면서 자랐던 나와는 천지차이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기억력도 떨어지고 이해력도 낮다. 몇 번을 가르쳐줘도 잘못하니까 아이들이 직접 해 준다. 그게 더 빠르고 정확하니까 크건 작건 애들에게 자꾸 의존하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문제도 애들을 불러댄다. 천천히 하면 될 텐데 애들한테 미루게 된다. 안 그래도 직장 다니며 애들 키우며 바쁘게 사는 애들이라 웬만하면 우리가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어린아이가 되어간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하려 해도 왠지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고 괜히 잘못했다가 일이라도 저지르면 어쩌나 하고 안 하게 된다. 어쨌든 나이가 들고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내 느린 걸음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집안에서 천천히 정리 하고 살림이나 하며 사는 게 서로 좋다. 어쩌다 애들이 오면 맛있는 거나 만들어 주고 좋아하는 음식이나 물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더 많은 것을 원하면 안 된다. 손주들을 봐달라면 봐주고 애들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아이들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가고 있다. 얼마가 되었든 앞으로 우리가 애들을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우리가 자식들의 도움을 받고 살 때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등굽은 소나무가  넓은 품으로 우리를 안아준다.(사진:이종숙)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던 시절을 다 살고 나니 앞 뜰에 반쯤 누운 등 굽은 노송의 모습이 되었다.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는 작은 소나무였는데 30여 년이 지나니 넓은 품으로 우리 집을 감싸 안아준다. 오랜 세월 불어오는 비바람 눈보라를  다 막아주느라 늙어가지만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나이 들어가는 남편과 나의 모습 같다. 힘이 없어 보여도 뿌리가 깊고 해마다 새 솔방울로 봄을 알려준다. 굵은 가지에 온갖 새들이 날아들고 겨울에는 토끼가 추위를 피해 나무 아래서 기거한다. 까치와 참새 그리고 블루 제이와 로빈은 서로 친구가 되어 숨바꼭질을 한다. 추워서 나가고 싶지는 않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유리창 가까이에 자라는 새순을 바라보며 마음에 봄을 품어 본다.

이제 머지않아 나무에 파란 잎이 돋아나면 밖은  다른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 겨울은 없어지고 봄이 와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할 것이다. 우리가 늙어가아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손주들은 나무의 새싹처럼 푸르게 성장한다. 멈추지 않는 자연의 순환은 계속되고 인간은 순응하며 때가 되면 떠난다. 세상을 다 쥘 것 같았던 세월도 있었고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세월도 있었다. 겨울이 올 것 같지 않았던 봄이 있고 오지 않을 것 같은 겨울도 왔다 갔다. 남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계절이 내게 오고 갈지 모르지만 오는 대로 감사히 받아야 하리라. 힘들었던 시간도 좋았던 시간도 지나고 보니 다 아름답다. 안타까운 날들도 서운했던 시간도 보내고 나니 그립다.

무심한 세월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하고 외롭게 하기도 한다. 세 아이들 키우느라 너무 바쁠 때는 나만의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 내게 있는 거라고는 (돈하고) 시간밖에 없다. (시간만 있고 돈 없는 것은 어쩐지 초라해 보여서 하는 소리)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루하루 먹고 자고 놀고 하며 세월을 잊고 산다. 연말이라고 아이들이 집에 온다 해서 음식을 장만하며 기다렸는데 벌써 3월 중순이다. 어영부영 3개월이 갔으니 일 년 중 사분의 일이 지나간 셈이다. 사람들은 유행병에  불안하여 초조해하고 으로만 향해오던  발길을 집안에 가두어야 한다. 식당과 공원과 쇼핑이 일상인 시간들을 접어가고 배달음식에 택배 그리고 화면 학습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전쟁으로, 재난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생활은 많이 변화된다. 지나친 풍요와 자유가 만들어 놓은 지금의 사회를 자제와 절제로 다듬어야 한다. 사회적 거리를 지키며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집안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지혜도 배워간다. 할 일이 없다며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할 일을 찾아내서 뭐라도 해야겠다. 너무 심심하면 괜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틈틈이 청소도 하고 집안 정리도 하면서 하루하루 늙어가지 말고 익어가자. 멋지게 익어 가자.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해맑다.(사진:이종숙)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바이러스 ,,, 다 같이 막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