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낮 시간이 짧아져 간다. 텃밭 채소들이 떠나갈 때가 되었다고 게으름을 펴며 드러눕는다. 날이 추워지고 물을 주지 않으니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남편은 텃밭 청소를 서두른다. 이번 주가 지나면 온도가 내려가서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방울토마토와 쑥갓을 뽑아냈더니 텃밭이 깨끗하다. 일조량은 짧아졌어도 혹시나 하여 고추와 깻잎은 이번 주말에 뽑기로 하고 텃밭을 뒤집어 주는 남편이 흙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열심히 한다. 여름 내내 우리 둘에게 싱싱한 채소를 공급해주어 맛있게 먹었다. 늦게 오는 봄에 날씨까지 나빠서 6월에 심은 채소들인데 그나마 잘 자라주었다.
봄이 늦은 이곳에 5월에 모종을 파는데 5월 마지막 주일까지 밭에 심을 수가 없다. 마지막 추위가 그때쯤 폭설이 와서 강타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5월 하순에 여행을 가야 하기 때문에 며칠 앞당겨서 텃밭에 모종을 심고 떠났다. 갔다 오는 사이에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서 밭에 심은 모종이 꽁꽁 얼어 버린 적이 있다. 돈 버리고, 얼을까 봐 신경 쓰고, 약 오르는 상황을 겪고는 욕심을 버리고 6월에 모종을 심는다. 조금 늦게 자라도 충분히 먹을 수 있어 욕심을 버리고 산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텃밭에 만족하지 않고 온상에 채소를 길러먹는 집이 많다. 이른 봄부터 초 겨울까지 싱싱한 채소를 먹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는 해도 재주가 그만이니 어쩔 수 없다. 요즘 채소값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서 내년부터 우리도 온상을 지어 농사를 짓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까만 땅에서 파란 새싹이 뾰족하게 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예쁘지만 땀과 노력이 있어야 하기에 언뜻 나서지 못한다.
손바닥만 한 텃밭도 할 일이 많다. 씨 뿌리기 전에 땅을 뒤집어 주고 날씨를 보고 때에 맞춰서 씨를 뿌린다. 농사를 질 줄 모르지만 어깨너머로 들으며 배우다 보니 조금 나아졌다. 이웃끼리 모종을 서로 주고받으며 텃밭에서 나오는 채소를 먹는 맛이 쏠쏠하다. 친구가 오이와 깻잎 그리고 고추 모종을 주었는데 잘 자라서 여름 내내 잘 따먹었다. 호박은 이파리와 꽃만 무성하고 호박은 몇 개 열리지 않았지만 꽃을 예쁘게 피어 꽃구경으로 대신했다.
해마다 다른 채소들이 여름 동안 기쁨을 준다. 쑥갓이나 토마토도 풍성하여 끼니때마다 식탁에 올려졌고 부추와 파도 제 구실을 하느라 씨를 맺고 있다. 세상에 나온 모든 것들은 이유가 있고 저나다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배운다. 이곳에 몇 년 동안 파가 엄청 비싸다. 요리할 때 파를 안 넣어도 맛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파를 안 넣으면 무언가 빠진 것 같아 왠지 서운하다. 파를 사서 아껴먹지만 당할 수가 없어서 파뿌리를 땅에 심었더니 여름 내내 파를 사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넉넉하게 먹는다.
얼마 전에 시골에 사는 지인이 추수를 했다고 마늘과 감자를 가져다주어 잘 먹었는데 이번에는 당근과 비트 그리고 단호박을 잔뜩 가져왔다. 아침마다 쪄서 먹는데 정말 맛있다. 땅에서 난 보물들이 보기만 해도 배부르게 하는 것을 보면 농부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일 년 내내 장사하기도 바쁜데 힘들게 진 농사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어 너무 미안하다. 집에서 가까우면 바쁜 여름에 텃밭에 난 풀이라도 뽑아 줄텐데 멀리 살아서 그것도 용이하지 않아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기만 한다.
햇살이 아까운 이곳 여름이 가고 가을도 어느새 중간쯤 와 있다. 작은 바람에도 맥없이 떨어지는 단풍 진 이파리가 낙엽이 되어 땅에 눕는다. 한해의 노곤함으로 잠시 쉬고 싶은가 보다. 백 년 가까이 살다가는 인생이 지나고 보면 짧다고 하는데 계절은 너무 짧다. 봄을 애타게 기다리다 보면 봄이 다녀갔는지도 모르게 여름을 맞는다. 더운 줄도 모르게 여름을 보내고 나면 가을이 온다. 예쁜 단풍을 바라보면 어느새 낙엽을 밟으며 텅 빈 나뭇가지를 만난다.
때로는 심심하기도 한 하루하루가 지나고 나면 왜 이리 세월이 빠른지 모르겠다. 나에게 40대 50대가 있었나 하는 생각에 약간은 허무하기도 하다. 바쁘게 살다 보니 왔다간 세월들이다. 하루하루 다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던 날들이 지나고 나니 희미한 기억뿐이다. 삶은 흐르는 물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생을 다하여 넘어지고 시들은 채소를 말끔히 걷어낸 텃밭이 깨끗하여 보기 좋다.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청소하는데 나는 구경만 하고 있다.
하늘은 높고 푸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지만 낮시간은 여전히 따뜻해서 좋다. 계절은 말없이 순환하여 오지 말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가지 않으면 올 수 없고 온 것은 간다. 만남과 헤어짐이 어우러져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세월은 아쉬운 듯 가버리고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다. 잡을 수 없는 세월을 따라왔는데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봄이 오면 봄을 맞고 가을이 가면 가을을 보내자. 주먹 쥐고 왔으니 주먹을 펴고 갈 때까지 잘살면 된다.
인생은 씨를 뿌리고 거두는 행복의 들판이다. 바쁘게 사는 아이들을 보며 내 젊은 날을 생각한다. 어찌 살아왔는지 모른다. 여름의 뜨거운 날들이 다 지나고 추수 끝난 빈 들판의 평화로움 속에 가을이 간다. 행복은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