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곳에 한인성당이 생긴 지 46년이 되는 날이고 본당 주보성인 성 정하상 축일이다. 해마다 전신자가 모두 함께 식사를 하고 운동회를 하는 날이다. 여성분과 위원들이 정성 들여 준비한 점심으로 나온 김치볶음밥과 제육볶음과 불고기 그리고 배추부침과 빈대떡이 너무 맛있어서 한 그릇 다 먹고 디저트로 나온 송편과 포도를 먹었다. 운동장에 앉아서 아이들과 청, 장년들이 줄다리기와 축구를 하는 것을 보며 박수를 치고 웃으며 한동안 놀았다.
집에 오는 길에 배가 고파 먹다 남은 송편과 바나나를 먹고 집에 와서 볶음밥과 된장국을 먹었더니 배가 너무 부르다. 하루종일 먹고 놀았더니 아무래도 배가 부둥해서 안 되겠다. 이대로 앉아서 뭉그적거리다 보면 배만 커진다. 마음 같아서는 눕고 싶지만 밖으로 나간다. 소화도 시킬 겸 해서 뒤뜰을 걸으며 텃밭에서 자라는 채소들을 본다. 올해는 나름대로 잘 자라준 채소가 고맙다. 오이와 고추와 깻잎은 끼니때마다 식탁에 오르고 토마토는 이제 익어 먹기 시작했는데 맛있다. 신기하게도 물과 햇볕과 바람이 먹을거리를 만든다.
채소들과 이야기하고 감사를 전하며 동네 한 바퀴 걸어본다. 어느새 낙엽이 여기저기 쌓여서 바람이 불고 차가 지나갈 때마다 푸석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닌다. 며칠 전만 해도 예쁜 단풍이 눈을 현혹해서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감탄했는데 이제 앙상한 가지로 서있는 나무들이 하나둘 생긴다.
동네 한 바퀴 코스는 정해져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지나 캐네디언 성당 앞으로 걷는다. 일요일 저녁 미사를 위해 온 신자들 차가 주차장에 꽉 차 있다. 미사시간이 신자들의 편리를 위해 주일에는 오전에 세 번 있고 저녁에 한번 있다. 아침에 일찍 오는 사람, 저녁에 오는 사람, 또는 늦잠 자고 점심 전후로 오는 사람들도 나누어진다. 일요일에 각자의 시간대에 맞춰 미사를 봉헌하면 된다.
성당 앞에는 지난해부터 짓기 시작한 아파트가 제법 많이 올라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멋진 모습으로 동네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옛날 건물들은 하나둘 모습을 감추고 새 건물들이 자리를 잡는 것이 한편으로는 서운하지만 산뜻한 맛으로 잊힌다. 성당을 지나면 조그만 쇼핑몰이 있다. 의사진료실, 약국, 치과를 비롯하여 식당과 어린이집도 있고 은행과 술집도 있어 동네 사람들이 오며 가며 이용한다.
길을 건너면 두 개의 고등학교와 체육관이 있다. 아이들이 다니던 고등학교이자 35년 전 내가 다니던 천주교 고등학교라서 정이 들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정문을 보며 지나간다. 30대 중반에 16살짜리 아이들과 같이 공부를 하던 때의 감회가 새롭다. 엄마뻘인 나를 도와주고 같이 옆에서 놀아주던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 지금쯤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으리라. 오래된 학교이지만 세월 따라 보수를 하여 보기에는 새 건물 같다.
학교옆에는 커다란 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산책도 하고 피크닉과 바비큐를 할 수 있다. 한쪽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고 가파른 언덕이 있어 겨울에는 눈썰매를 탄다. 각종 행사를 하고 특별한 날은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불꽃놀이를 하는 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어느새 활엽수는 단풍이 들어 노랗고 빨갛더니 많이 떨어졌다. 다시 공원 앞으로 길을 건너면 집으로 가는 길이다.
많은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집집마다 여러 가지 꽃들을 키우며 평화롭게 산다. 오래도록 이사를 가지 않고 이곳에 산 이유 중에 하나가 가까이에 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길건너에 있는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제 성인이 되어 각자의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키우며 살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동네가 좋다. 조용하고 편리한 이곳은 마치 숲 속의 별장 같은 곳이다.
집둘레에 나무들이 있어 사시사철을 보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사는 동안 한두 번 싫증이 나서 새 동네를 가보면 나무는 없고 집들만 빼곡하여 살벌한 느낌 때문에 이곳을 고집한다. 집이 가까이 보인다. 원래는 빨간 지붕에 하얀 담이었는데 지붕과 담이 오래되어 지금은 회색 지붕과 회색 담으로 바꿨다. 배가 불러서 소화를 시키려고 한 바퀴 돌아왔더니 이제 소화가 되었는지 배가 가볍다. 먹고 또 먹어도 소화에는 자신만만했는데 지금은 절대 과식은 안된다. 배가 고프다고 무조건 먹으면 내가 괴롭기 때문에 조금씩 자주 먹는다. 욕심내지 말고 과하지 않게 생활해야 한다.
배가 부른 덕분에 동네를 돌며 가을 구경을 잘했다. 잠시 다녀가는 짧은 가을이라 틈틈이 구경해야 한다. 언제라도 눈이 올 수 있는 이곳의 가을이다. 언젠가 한 번은 9월에 눈이 온 해가 있었다. 물론 다음날 눈은 녹았지만 텃밭에 있던 채소들이 얼어 못 먹었던 황당한 일이었다. 가을이 길고 겨울이 게으름피며 늦기 오기를 바라지만 내 마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다. 9월이 익어가며 가을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