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오는 시간은 알아도 가는 시간은 모른다고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시간을 받고 태어난다고도 한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나이를 먹는 것이 좋았던 시절이 지나 나이 먹는 게 반갑지 않다. 아이나 어른이나 남은 세월이 짧아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과 살아온 날이 많은 사람과는 다르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남은 세월이 짧기 때문이다. 세월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데도 게으름을 피운다. 금쪽같은 시간을 대충대충 보내며 산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을 그냥 보낸다. 내일이 오늘처럼 올 거라고 믿고 기다린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음을 알아도 오지 않은 내일을 기다린다. 봄을 기다리다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체념하면 봄을 만난다. 아름다운 가을이 가지 않을 것 같아도 겨울은 가을을 제치고 온다. 나이 든 사람들을 보면 나는 저렇게 늙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나의 모습이 되었다.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고 강물 같은 주름이 얼굴에서 흐른다. 곧았던 허리도 굽고 피부는 탄력 없이 쳐진다. 거울을 보면 전에 보지 못한 낯선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은 내 남은 날들 중에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세월 따라 찾아오는 늙음은 절대로 나를 피해 가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니 지붕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게 보인다. 이제 온도가 내려가고 겨울이 온다는 경고이다. 겨울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겨울 없이 절대로 봄은 오지 않는다. 며칠 전 뉴스로 본 고국소식에 온도가 여름이상으로 뜨거워서 꽃이 피고 벼이삭이 다시 자란다고 한다. 엘니뇨 현상으로 계절을 잊는 것 같지만 겨울은 언젠가 온다. 여름인 줄 알고 핀 벼이삭이나 꽃은 추위에 금방 얼을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는 인연은 더없이 소중하다. 그 많던 꽃과 새들은 월동준비로 바쁘다.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해 긴 겨울을 견뎌야 하고 그날을 기다려야 한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푸르다. 지붕에 내린 서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며 녹아내린다. 온종일 조금씩 녹으며 하루를 보내고 밤을 맞고 또 서리가 내린다. 어릴 적 뛰어가며 '세월아 빨리 와라' 하던 손짓이 이제는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세월이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돌아가는 길도 없고 급하게 가는 길도 없이 나와 함께 간다. 세월과 동행하는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이제는 서리와 주름살과 함께 어깨를 구부리고 겸손이 와 같이 간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아무리 권력이 세도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다. 파란 하늘이 내려다본다. 구름을 품고 비와 눈을 안고 바람과 같이 사는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희로애락을 안겨다 준다. 나만 불행하지 않고 나만 행복할 수 없다. 햇볕은 비가 오면 세상을 말려주고 눈이 오면 녹여준다. 비바람이 불어와서 세상을 깨끗이 청소해 주고 눈이 내려 더러운 것들을 덮어준다. 지진이 발생하여 세상을 짓밟고 전쟁이 나서 생명을 앗아간다. 세상사는 반반이다. 기쁨과 슬픔이 있고 고통과 희열이 있고 생과 사가 있다. 웃고 울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싫어도 좋아도 삶을 끓어 안고 살아야 한다. 남의 잘못은 보여도 나의 잘못은 모른다. 바른말을 해주면 들리지 않고 잘못된 길을 걸어간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줄 알지만 법망을 피하려고 한다. 지금 피할 수 있어도 잘못을 영원히 묻을 수는 없다. 도망가는 길은 좁아져 언젠가는 외길에서 잡힌다. 아는 것도 잘못이고 모르고 하는 것도 죄라는 말도 있다. 바람이 없는 상큼한 날씨다. 서리가 와서 추울 줄 알았는데 햇살이 고와서 청명하다. 더 좋은 날을 바라고 더 편하기를 바라지 말자. 자연이 가는 대로 그냥 놔두자. 세상만사 그 어느 것도 거스를 수 없다. 내게 온 것들과 나를 떠난 것들은 이미 계산되어 있는 것이다. 얼마만큼을 가지고 언제까지 어떻게 사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때가 되면 그때 알게 될 것이다. 미리 세상을 알려고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내가 잘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것없이 시시해 보여도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빨리 가려고 하지 말자.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한다. 천천히 음미하며 작은 것에 감사하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잘 풀린다. 좋은 일은 나쁜 일을 품고 불행은 행복을 품고 있다. 하늘을 보면 답이 나온다. 어제의 나는 없고 내일의 나도 없다. 내가 있는 지금에 충실하면 좋은 내일이 나를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