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오던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린다. 여름에도 그리 덥지 않은 이곳에 비가 오니 한기를 느껴 웃옷을 하나 더 입고 밖을 내다본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바깥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무들에 둘러싸여 작은 별장 같은 우리 집 이야기이다. 이름도 모르는 나무들이 비를 맞으며 빗방울을 땅으로 똑똑 떨어뜨린다. 앞뜰에 서있는 나무에 꽃이 만발했다. 우리가 이곳에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나무라서 이름은 모르지만 6월에 꽃이 피고 여름 동안 푸른 잎을 자랑한다. 생각지 못한 겨울이 갑자기 찾아보면 가을에 잎을 떨구지 못하고 단풍을 봄까지 안고 가는 나무인데 봄을 맞아 낡은 잎을 다 떨구고 이제야 꽃이 피었다. 노란색에 가까운 흰색으로 꽃이 동글동글 앙증 맞고 예쁘다.
사시사철 언제나 참새들이 재잘대는 나무다. 눈 오는 한겨울에도 나뭇가지에 새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사랑을 하며, 근심 걱정을 나누는 곳이다. 이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하얀 꽃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꽃송이마다 저 나름대로의 최선의 모습으로 해님을 맞고, 바람을 가슴에 안는다. 그들에게 거부는 애초에 없는 것처럼 순종하며 살아간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꽃을 피운다. 싫다, 좋다 말하지 않고 살아간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고 매일 새들이 들락 거린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겨울에는 나무속이 따뜻해서 모여든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나뭇가지가 늘 바쁘다.
그 옆에 100년도 넘은듯한 전나무가 보살펴 준다. 바람막 이 되어 눈보라와 비바람을 막아주고 따스한 품으로 작은 나무를 껴안아 준다. 참새들은 까치와 로빈과 더불어 잘 살아간다. 때로 까마귀도 놀러 오고 블루 제이도 마실을 와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간다. 커다란 전나무 아래는 비도 안 맞고 바람도 없고, 눈도 쌓이지 않아 친구들이 많이 찾아온다. 한겨울에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토끼도 앉아서 쉬다 가는 곳이다. 지나가는 까치는 넓은 전나무 품이 그리워 어이론가 날아가다 말고 날개도 차마 접지 않은 채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한다. 한 번은 까치가 한쪽 날개를 땅에 늘어 뜨리고 절뚝거리며 뒤뚱 거리고 있었다. 어디 다쳤나 해서 물이라도 주려고 그릇에 물과 채소를 조금 넣어 가져다주는 사이 휙 날아가 버렸다.
다친 것이 아니고 쉬고 싶어 급히 내려오느라 날개를 접지 못한 것이었다. 그 전나무 옆에는 위로는 자라지 않고 옆으로 크는 앉은뱅이 나무가 있다. 앉아서 특별히 하는 일 은 없지만 지나가는 나비나 잠자리가 쉬었다 간다. 나무 아래에는 남몰래 키우는 둥굴레가 자란다. 햇빛이 별로 없는 곳에서 해마다 하얀 방울꽃도 피어내는 둥굴레가 기특하고 귀여워 그 옆을 지나며 엎드려서 나무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둥굴레를 본다. 올해도 가늘게 자라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과 바람 그리고 나무가 조금씩 나누어주는 빗방울로 목을 축이며 산다. 세상에 넓고 넓은 땅을 놓아두고 우리 집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둥굴레가 고맙다.
등굽은 소나무가 올해는 솔망울을 많이 달았다.(사진:이종숙)
앞 뜰 왼쪽에는 늙어서 등이 굽은 소나무가 올해는 유난 히 많은 솔방울을 달고 의연하게 서있다. 마치 유행가 제목 "내 나이가 어때서"처럼 노후를 자신 있게 맞으며 남은 생을 멋지게 산다. 팔을 벌리고 넓은 품으로 우리 집을 감싸 안으니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롭다. 뒤뜰 입구에 커다란 라일락 나무가 있다. 진보라색으로 피기 시작하여 만개할 때는 연보라색이 된다. 은은한 향기가 동네를 돌며 이웃들과 봄을 나눈다. 예쁜 분홍색 꽃을 피우며 자태를 자랑하던 사과나무는 꽃이 다 지고 이파리가 무성하다. 조금 있으면 꽃이 있던 자리에 손톱만 한 사과가 달릴 것이다. 올해는 좀 더 큰 사과가 열리기를 바라며 남편이 지난번에 꽃을 솎아 주었는데 모르겠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자연은 제가 할 일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욕심내지 않는다. 커다란 마가목도 한몫하고 서 있다. 하얀 꽃이 바람에 날려 꽃잎이 텃밭을 하얗게 덮었다. 그래도 아직 정정하게 꽃을 자랑하며 비를 맞고 있다. 어느 날 더 멋진 열매를 맺어 새빨갛게 익어가기 위해 오늘의 이까짓 비바람은 거뜬히 견딘단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아직 쏟아 낼 비가 더 있어 보인다. 이렇게 비가 오니 잔디는 좋아라 하며 더 파랗게 잘 자란다. 남편이 엊그제 짧게 깎았는데 밤새 부쩍 자랐다. 텃밭에 있는 채소들도 잔디처럼 쑥쑥 자라서 식탁에 오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올해는 유난히 봄이 늦게 와서 모든 것이 늦어졌다. 뒤 문 옆에 서있는 앵두나무는 꽃 있던 자리에 파란 앵두를 다닥다닥 매달고 서있다.
어느 날 빨갛게 익어 맛있게 하나 둘 따 먹을 것을 생각하니 침샘이 난리가 났다. 목마른나무들이 비를 맞으며 신나는 날인데 나도 덩달아 신이 난다. 파랗게 자라는 식물들을 보니 비도 고맙고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자연도 고맙다. 부추가 부쩍 자라 있는 것을 보니 잘라서 부추 넣고 부침개나 해 먹어야겠다. 아무리 외국에 오래 살았어도 옛날에 엄마가 해주시던 부침개는 그리움의 음식이다. 더군다나 한국을 갈 수 없는 지금은 옛날에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내가 그렇듯이 멀리 사는 아이들도 내가 만든 부침개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 자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부침개 하면 엄마가 생각날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보니 오랫동안 보아왔던 나무들이 새삼스레 커 보인다. 이곳에 이사 왔을 때는 작은 나무였는데 아이들이 자라듯 나무들도 자라서 키도 크고 굵어졌다. 해마다 몇몇 가지는 죽고 새 가지가 생긴다. 나무도 사람처럼 자라서 늙고 떠난다. 우리는 안에서 살고 나무들은 밖에서 우리를 지킨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 힘들어하는지, 어디가 아픈지 바라봄으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목마를 때 물을 주고 죽은 가지를 쳐주며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