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에 대식구가 다시 모이기 시작한 지 4일째다. 큰아들 식구가 2주간 우리 집에 와서 있기로 하고 지난 토요일 도착했다. 마침 그날은 손녀딸이 2살이 되는 생일날이라서 생일잔치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오기 전에 장을 봐서 몇 가지 준비했더니 근사한 한상이 차려졌다. 가까이 사는 둘째네도 오니 열식구가 된다. 아이들이 오랜만에 먹은 엄마 음식이 맛있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피곤함도 잊게 된다. 조금 피곤해도 자고 나면 풀어지고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해줄 수 있을 때 더 자주 해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이가 들고 근력도 예전 같지 않아 쉬엄쉬엄 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니 다행이다. 100세 시대에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내 나이이지만 남편과 단순하고 조용하게 살다가 아이들이 어쩌다 집에 오면 정신도 없고 힘은 들지만 이것이 행복임을 새삼 더 느낀다.
주위에 지인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도 많고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겠다는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살지만 여러 가지로 걱정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애 낳고 사는 아이들이 고맙다. 적령기에 짝을 만나 아이들 낳아 손주들을 데리고 이렇게 집에 와서 놀다 가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다. 세상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다들 알아서 살아가니 천만다행이다. 엄마 아빠 집이니 몸도 마음도 편하니까 아무 때나 온다. 밥 먹고 놀고 웃고 형제들끼리 정을 쌓으며 시간을 보내고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하여하지 못한 말들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이들은 여전히 일을 하며 손주들을 봐야 하기에 엄청 힘들어한다. 어차피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이 일을 할 수 있는 요즘 세상이니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집에서 일을 하면 훨씬 편하다.
어린애들하고 좁은 아파트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일하고 먹고 하는 것이 힘들 텐데뜰이 넓은 부모집이 있어 다행이다. 손주들은 안팎으로 들랑거리며 놀기 바쁘다. 전염병으로 왕래 없이 살다가 사촌끼리 만나니 정말 신나는 모양이다. 온 동네가 시끌시끌하게 웃고 노는 모습이 너무 좋다. 이웃집 사람들이 주말마다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떠든다고 나름 흉을 봤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게 되었다고 남편과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러니 살면서 남의 흉을 볼 것도 욕을 할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바비큐를 좋아하니 고기만 준비하면 된다. 삼겹살이나 스테이크는 특별히 양념할 것도 없으니 부담스럽지 않고 맛있어한다. 잡채와 묵을 만들고 밭에서 자란 상추와 쑥갓 그리고 깻잎을 씻어놓고 쌈 장과 무쌈을 곁들여 먹으면 더 많은 반찬도 필요 없다. 김치와 나물 그리고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놓으니 생일상이 완성됐다.
원추리 꽃이 아름답다.(사진:이종숙)
반찬 한 가지라도 더 만들어서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 정도면 만족한다. 며느리 둘이서 와인을 마시며 동서끼리 정을 나누고 남편과 나는 손주들을 안아주며 달래주고 쫓아다니는 이런 시간이 최고의 행복이다. 돈이 많아서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것도 행복이지만 아이들이 집에 와서 시간을 함께하며 웃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다. 오랜만에 와서 편하게 잘 있다 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부모 마음을 세월 따라 언젠가 아이들도 알게될 날이 올 것이다. 세상은 점점 살기 힘들어 가는데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지 궁금하다. 식량이 부족하고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오고 있지만 각자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아이들 키우며 사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내가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어도 힘닿는 대로 옆에서 도와주니까 모든 것이 다 잘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아이들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영원히 어린 아이다.
재미있게 먹고 놀며 천진하게 웃는 아이들의 마음에 평화가 넘친다. 내가 그 나이 때 힘들었던 시간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민 1세의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힘든 세월을 이겨냈기에 그들은 적어도 비빌 언덕이 있는 것이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곳에 와서 몸으로 때운 세월은 오늘을 가져다주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젊은 날을 맘껏 즐기기를 바라며 그들이 살아가는 앞날이 평탄하기를 기원해 본다. 쉬지 않고 달려온 날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듯이 아이들도 나름대로 저희들의 길을 걸으며 나날의 삶 안에서 행복을 찾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많았던 시절에는 욕심도 많아 행복이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할 일이 적어진 지금은 욕심도 없고 행복도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좋다.
매일매일 손주들을 쫓아다니며 나도 그들이 되어 그들의 천진함을 배운다. 걱정 없이 먹고, 놀고 웃으며, 피곤하면 자고, 해맑은 모습으로 순간을 살아가는 손주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은 내게 무엇을 배울까? 배울 것이 있는 할머니인가? 어릴 적 나의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7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병풍 뒤에 누워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고와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맏손녀 딸인 내게 유난히도 다정하시던 할머니는 자는 듯이 떠나시고 어른들과 상여 뒤를 쫓아가며 통곡한 생각이 난다. 어른들의 등을 보고 배우는 아기들에게 세상의 평화를 보여주고 싶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기를 바람은 욕심이지만 세상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을 믿어본다. 할머니 할아버지 하며 우리를 따르는 손주들이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
행복은 특별한 모습을 하지 않는다.행복은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가슴으로 느낄 뿐이다. 소리 없이 다가와 함께 걷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길을 함께 동행하는 것처럼 기다림과 소망 안에서 행복은 이루어진다. 아이들이 웃고 손주들이 뛰어노는 모습에 취하여 오늘 내가 살고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험난했어도 다 지나간 날들이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도 하셨듯이 나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 두 손을 모은다. 아이들이 이곳에 있는 동안 영육 간의 휴식을 취하고 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웃으면 나도 행복하고 그들이 힘들면 나도 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