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뜻하다. 아침의 온도가 영상으로 12도라니 얇은 겉옷을 걸치고 산책길을 걷는다. 아무도 걷는 사람들이 없어 숲 속이 조용하다. 엊그제 무섭게 불어대던 비바람이 많은 나뭇잎을 떨어뜨려 길거리에 누워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하며 집을 흔들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졌으니 이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까이 보이는 계곡 에는 물이 많이 불어났고 커다란 나무들도 넘어져 있다. 그래도 비가 온 덕분에 숲 속은 아주 말끔하다.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오르내리며 열매를 따먹는지 나무가 출렁댄다. 아직은 여름이라 녹음이 우거져 있지만 절벽 아래로 깊은 곳에는 색깔이 변해가고 있다. 지난주만 해도 더웠는데 며칠 사이로 온도가 내려가서 햇볕을 따라서 걸어간다.
벌써 자연은 계절에 순종하며 차분하게 서 있다. 여기저기 둥그런 벌집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고 벌들은 열심히 꿀을 나른다. 몇 안 되는 들꽃들은 힘없이 하늘거리고 어린 나뭇잎들은 노랗게 단풍이 들어간다. 그래도 모기들은 여전히 달려들어 틈을 노린다. 손을 휘저으며 앞으로 간다. 긴 옷으로 살이 안 보이도록 가렸는데 어느새 모자 밑으로 들어와서 이마를 물고 도망갔다. 가려워서 만져보니 엄청 크게 물렸다. 몇 번 긁으면서 모기에게 욕을 하며 지나간다. 계곡물이 힘차게 흐른다. 많은 나무들이 계곡에 쓰러져 흐르는 물을 막으며 누워있다. 자세히 보니 하얀 노루 궁둥이 버섯이 군데군데 나무 위에서 자라고 있다. 쓰러져 누워서도 무언가를 하는 나무들이 기특하다.
벌집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사진:이종숙)
숲 속에 오면 자동차 소리 대신에 숲 속의 소리 듣기에 바쁘다. 새들과 다람쥐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흔들어 대는 나뭇잎 소리가 들린다. 숲은 수다 쟁이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 댄다. 물은 물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볕은 햇볕대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개미와 벌 그리고 수많은 벌레들은 겨울을 준비함에 게을리하지 않는다. 노랗고 까만 쐬기 한 마리가 나뭇잎을 갉아먹다가 담에 떨어져 꿈틀거린다. 징그럽다. 아무런 이익이 안 되는 것들 같은데 살아나간다.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모습이 꼭 삼 같이 보인다. 산삼이 있을 리 만무지만 집에 가서 찾아보려고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걷는다. 급할 것 없는데 서둘을 것 없다.
(사진:이종숙)
하늘도 보고 숲 속도 기웃 거리며 걸어간다. 봄 여름에 그렇게 많던 산나물이 하나도 없다. 산나물을 뜯으며 해가는 줄 몰랐는데 지금은 모기 때문에 숲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은 지금은 관심 없다. 무엇이든지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 나중에 해야지 하며 미루면 평생 못한다. 할 수 있고, 하고 싶을 때 해야지 안 그러면 평생 못하게 된다. 봄 까지만 해도 산책을 거의 뛰면서 빠르게 했다. 운동하기 위한 산책이었기에 마음도 몸도 다 급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운동도 중요하지만 가고 오며 숲과 이야기하며 걷는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보면 더욱 정다워진다. 기왕 숲에 왔으니 숲과의 대화도 중요하다.
봄에는 어떤 꽃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어떤 나무들이 어떤 모양을 하고 서 있는데 보면 재밌다. 앞만 보고 운동만 하는 것도 좋지만 숲이 사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죽은 나무에 버섯이 자라는 것이 보고 땅바닥에 노란색의 독버섯도 눈에 띈다. 예쁘고 좋은 것이 있는 대신에 나쁘고 독이 있는 것도 많다.
(사진:이종숙)
숲 속에서 자라나는 식물 중에 몸에 좋은 것들이 많을 텐데 그냥 지나쳐 간다. 남편과 나는 숲을 보며 세상사를 이야기하며 걸어간다. 잊어버리고 못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한다. 집에 있을 때는 한 공간에서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서로와 대화할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서로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전혀 모를 수도 있기에 자주 산책을 통해서 대화를 한다. 평소에 잊었던 이야기나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걸어간다. 언젠가 우리도 하나가 남을 시간이 있을 것이다. 먼저 가는 때를 생각하고 혼자 남아 있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서로에게 이야기해 둔다면 어느 날 갑자기 떠난다 해도 서로의 뜻을 알기에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이종숙)
지인 하나는 늘 혼자 여행을 다닌다. 같은 곳에 가더라도 하나는 기차로, 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만난다. 이유는 한날한시에 나는 사고로 인하여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란다. 반면에 한 친구는 항상 같이 다닌다. 사고가 나서 하나가 가고 하나만 남으면 너무 슬플 거라며 항상 같이 다닌단다. 둘 다 다 맞는 생각이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서로 대화를 통해 뜻을 전한다. 여전히 우리 둘만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뿐 오고 가는 사람들이 없다. 사람들은 멀리 조용한 곳에 여행을 가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사색을 하며 지나온 삶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데 이렇게 좋은 곳이 가까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름다움이 기다리는 숲 속의 갈(사딘:이종숙)
이곳에 오기 시작했던 때는 봄이었다. 숲에 나무들이 싹이 나지 않은 이른 봄부터 오기 시작하여 여름을 지나 가을이 온다. 그 많은 나무들은 이제 형형 색색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며 옷을 벗고 겨울을 맞을 것이다. 봄처럼 겨울도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자연은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언제나 안아주는 엄마의 품 같다. 힘들 때나 방황할 때 커다란 품으로 안아주는 이 숲이 있어 너무 좋다. 시기도, 질투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숲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고 특별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이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숲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숲을 찾아와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