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온도가 많이 내려갔다. 해마다 이맘때면 눈이 오는 경우가 많아 아무 때나 눈이 올 것을 대비한다. 작년 이맘때 아이들과 여행을 갔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고 추워져서 길이 얼어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눈이 올 거라는 예보를 들었다. 이제 날씨가 추워지고 겨울도 가까워지고 있다. 얼마 안 되는 텃밭 농사도 추수를 해야 한다. 고추도 따서 그릇에 담아 놓고 고춧잎도 뜯어서 살짝 삶아서 초고추장에 무쳐먹으려고 삶았다.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뜯어놓으니 꽤 많다. 삶으면 한주먹 밖에 안되지만 고향 생각하며 먹는다. 깻잎도 다 뜯어서 간장과 설탕 그리고 식초를 1대 1대 1로 넣고 장아찌를 담았다. 반찬 없을 때 조금씩 무쳐먹으면 맛있다. 옛날에 할머니들이 하던 일들을 내가 한다. 호박 세 개는 참외만 하게 자랐는데 따지 말고 며칠 더 놔둬야겠다.
가을 햇볕은 강하지 않아서 더 자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며칠이라도 볕을 받으면 따버리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추수라고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몇 가지 안 되는 채소가 여름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으니 얼어 죽게 놔두고 싶지는 않다. 상추는 달팽이가 먹어버려서 얼마 전에 다 뽑았고 쑥갓은 노랗게 꽃을 피더니 지금은 씨를 잔뜩 물고 바람에 휘청대며 가을을 맞는다. 여름에 아이들이 와서 신선한 야채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낸 것이 또 한 장의 추억이 되었다. 봄도 가고, 여름도 가고, 이제 가을이 왔는데 코로나 19는 언제 갈지 아직도 꼼짝 않는다. 3월 중순에 공공장소가 문을 닫고 외출을 금지하며 방역에 힘을 다 쏟았는데 무서운 전염병은 제 자리를 지키고 버틴다. 미국에 난 산불로 코로나 19의 확산이 우려된다고 하는데 걱정이다.
생각지도 못한 전염병으로 영세업자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경제는 바닥을 친다. 보이지 않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세균의 확산으로 사람들은 두려워하는데 계절은 이렇게 오고 간다. 인간의 걱정은 아랑곳없이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높고 푸르다. 야채밭에 송이버섯 두 개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어제도 못 보고 지나쳤는데 오늘은 보인다. 자연은 그래서 신비롭다. 추수라고 해야 별것 없지만 하루 종일 이것저것 하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픈데 기분은 좋다. 남편은 채소밭을 뒤집고 나는 채소를 삶을 것 삶고 장아찌를 담았다. 체리 나무 옆에서 자라고 있는 부추도 잘라서 오이 몇 개로 오이소박이를 담아 놓았다. 감자도 아파리를 무성하게 보이며 땅속에서 굵어지고 있다. 집안일을 이것저것 하다 보면 하루가 모자라다. 매일매일 게으름 피우며 미루던 일들을 햇빛 좋은 가을날에 하나씩 하며 가을을 보낸다.
(사진:이종숙)
겨울이 언제 올지 모르기에 미리미리 준비한다. 이곳의 겨울은 무시무시하게 춥다. 지난 1월 중순에 멕시코에 여행을 다녀오던 날의 온도는 영하 39도에 체감온도는 영하 50도에 가까운 온도였다. 아마도 상상이 안 가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곳의 겨울은 정말 춥다. 기후온난화로 조금은 나아졌지만 아직도 많이 추운 이곳에는 겨울 스포츠가 인기다. 스키와 스케이트와 하키 같은 겨울 운동으로 사람들은 긴 겨울을 이겨내며 산다. 며칠 전에 남편은 올 겨울 추운 날 벽난로에서 피울 장작을 뻐개서 차고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장작은 많아도 한꺼번에 할수 없으니 천천히 하면 된다. 이제 완벽한 겨울준비를 해놓고 한가로이 가을빛을 받으며 겨울이 올 때까지 산책을 즐기며 살면 된다. 김장철도 다가오지만 엄두도 못 내고 산 지 오래되었다. 김치가 먹고 싶으면 배추 한두 개씩 사다가 해 먹으면 된다. 올해 달팽이가 많아서 내년에는 그냥 아무것도 심지 않고 싶은데 봄이 오면 변덕스러운 내 마음은 분명히 바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지나간 것은 다 잊어버리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래도 서운하게 했던 사람은 안 잊힌다. 요즘은 그런 사람도 다 잊으려 노력한다. 그게 다 내 잘못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 용서할 수 있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만사 쉽게 생각하고 싶다. 친구도 계절처럼 바뀐다. 옛날에 친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서로 모른다. 아이들이 자라고 친구도 바뀌며 이렇게 나이 들어간다. 바람 같은 세월에 바람처럼 살다 간다. 때로는 따스한 바람이 불기도 하고 더러는 혹독한 바람이 불기도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겨울을 완벽하게 준비해도 또 다른 걱정으로 살고, 봄은 봄이 오고 싶을 때 온다. 기다리지 않고, 붙잡지 않으며,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산다. 해가 짧아지고 그림자는 길어지고 해는 저물어 간다.
며칠 뒤엔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이 된다. 해는 자꾸 짧아져가고 동짓날이 지나면 해가 조금씩 길어지며 봄이 되어 간다. 이 얼마나 신비한가? 우리가 안달한다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연 따라 자연이 하라는 대로 살면 된다. 조금 아는 것을 다 아는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우리네이다. 과학이 발달되어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조상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을 새삼스레 들추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다. 지구가 오염되어 몸살을 앓는다.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옛날같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으로 또는 전염병으로 인구 조절을 하는 것은 자연의 계산에서 온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안 되는 텃밭 농사 추수를 하며 생각이 너무 멀리 왔는데 남은 것 마저 하고 정리를 마무리해야겠다. 하다 보면 별것 아닌데 하기가 귀찮아서 미룬다.
고추와 고추꽃이 어울려 논다.(사진:이종숙)
나에게도 일이 무섭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월이 간다. 등판에 내리쬐는 가을 햇살이 따스하다. 나무에서 떨어진 단풍잎 하나가 어깨에 살며시 앉아서 인생은 아름답다고 속삭인다. 신발에 붙어서 집안까지 따라 들어온 낙엽도 내가 있어 외롭지 않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