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봄을 방해하는 꽃샘바람인지 아니면 얼음을 녹이는 봄바람인지 나무들이 춤을 춘다. 하늘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고 뿌옇다 못해 회색이다. 그렇다고 비가 올 것 같지 않은데 흐리다. 이런 날은 내 마음도 덩달아 회색이 된다. 회색은 우울과 게으름과 가라앉는 색이다. 밝은 색을 보면 마음도 밝아지는데 어두운 색은 마음을 우중충하게 한다. 밖을 보며 이런 날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할까 생각해본다. 계획 없이 노는 세월은 쌓여가고 할 일은 자꾸 뒤로 미룬다. 내가 할 일을 누가 해주지 않는 것을 알지만 머릿속으로만 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봄이 온다고 하는데 봄을 맞을 준비는 하나도 안 한다. 집안이 겨울의 모습으로 나를 쳐다본다. 언제 화사한 봄으로 바꿔줄 거냐고 물어와도 모른 체하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이 만든 인생만 구경하고 사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멍청히 앉아서 드라마에 빠지고 코미디에 빠져 시시덕거리고 산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허무맹랑한 쇼에 덩달아 흥분하고 가슴 아파한다. 소설 속에 인생 있고 인생에서 소설이 나온다. 드라마나 영화는 창작이지만 사람 사는 것이 참 여러 가지다. 봐도 봐도 끝이 없고 들어도 들어도 한이 없다. 무한한 사람의 생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앉아서 보다 보면 내 귀중한 시간 빼앗기는 것을 모르고 빠져 산다. 내가 할 일은 산더미인데 남이 만든 인생 구경하느라 내 할 일을 못한다. 자상한 남편이 틈틈이 계절이 바뀌기 전에 정리를 도와주어 다행이지만 마지막 손질은 내가 해야 한다. 투박한 겨울옷이 팔을 벌리고 옷장을 차지하고 있다.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추운 이곳의 날씨라서 너무 일찍 겨울옷을 치웠다가는 다시 꺼내야 하기에 늑장을 부린다. 시도 때도 없이 춥고 눈도 오기 때문에 봄은 그저 이름뿐인 봄이다. 작년에 찍은 사진을 보니 이때쯤 눈이 많이 와 있었는데 올해는 양호한 편이다.
이제 3월 중순에 어떤 날씨가 여기를 찾아올지 모른다. 앞으로 2주간의 일기예보를 보면 그런대로 잘 넘길 것 같다. 겨울 속에 숨어있는 봄이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니까 일단은 겨울옷이나 부츠를 치워야겠다. 서머타임으로 해도 길어져서 먼지도, 어지러운 것도 눈에 잘 보인다. 건강이 최고라고 겨우내 눈 쌓인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며 살림살이는 뒷전으로 미루며 살았다. 건강도 좋고 산책도 좋은데 누가 내 일을 해주지 않는 이상 오늘 같은 날 집안 정리나 해야겠다. 매일 쓰는 것만 쓰고, 입는 것만 입고, 편하게 살아서 여러 가지도 필요 없다. 양보다 질이라고 좋은 것 몇 개 있으면 된다.
집도 아이들과 함께 살 때는 작은 듯해서 큰집으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아이들이 분가를 하니 이 집도 크다. 부엌에서 밥 먹고 마루에서 텔레비전 보다가 방에 가서 잠자면 하루가 끝난다. 방이 4개에 화장실도 3개 마루가 2개에 부엌에 식탁이 있고 부엌 옆에 손님 대접하는 방도 하나 더 있어 커다란 식탁이 하나 더 있다. 어쩌다 식구들이 모이면 작은집이 되지만 남편과 나만이 사용하는 면적은 얼마 안 된다. 청소를 하는 것도 힘들고 잔디 정리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눈이 녹은 뜰에 보이는 것은 겨울 동안 어디선가 날아온 쓰레기만 눈에 보인다.
봄을 기다리는데 할 일을 생각하면 눈이 많이 와서 다시 뜰을 하얗게 덮었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날씨가 좋아 복에 겨워하는 말이다. 구름 뒤에 숨었던 해가 나와서 세상을 비춘다. 나가서 노는 것도 좋지만 하루에 흐트러진 것 하나라도 치우며 살면 된다. 날 잡아서 한꺼번에 하려면 힘도 들거니와 미리 질려버린다. 일도 안 하는데 오늘 다 해버리면 내일 심심할 것이니까 조금씩 한다. 일단 무거운 코트를 치우고 늘어놓은 그릇을 차곡차곡 정리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다. 별것 아닌데 집안이 훤하다. 내일은 무엇을 할까 생각하니 빨리 내일이 오면 좋겠다.
매일매일 놀면서 집안 청소를 해야지 생각할 때는 불안했는데 조금씩 할 생각을 하니 더 신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에 철저히 준비하면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내일 하면 되지만 내일이 안 올지도 모르니 내일 것도 오늘 해 놓으면 내일이 오지 않아도 남은 사람들이 덜 힘들 것이다.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 할 일은 너무나 많다. 한 사람의 평생을 정리하는 일인데 내가 해야 한다. 봄 청소를 하며 별생각을 다한다. 아직도 마음은 새파란 청춘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새봄을 맞으려면 마음부터 깨끗해야 한다.
새로 태어난 심정으로 처음 만나는 봄을 맞으려면 지저분하고 투박한 겨울을 보내야 한다. 남의 삶을 들여다보며 세월 보내지 말고 움직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