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순경 쏟아진 눈을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에 걱정이 태산 같았던 기억이 난다. 가을이 채 여물기도 전에 겨울이 왔다는 것은 한마디로 쇼크였다. 6개월의 긴 겨울을 날 생각하면 참으로 암담한 것이다. 그렇게 겁을 주던 겨울은 시작만 거창할 뿐 그냥 가고 날씨는 다시 가을로 돌아갔다. 미처 덜 들었던 단풍도 마저 더 들고 추수를 못했던 농부들도 가을걷이를 끝낼 수 있었다.그렇게 시간이 가고 12월 초순이 되었는데도 겨울 같은 겨울이 오지 않자 사람들은 좋으면서도 은근히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눈이 없는 겨울, 춥지 않은 겨울은 좋지만 알 수 없는 걱정으로 초조해 하기 시작할 무렵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브라운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은근히 눈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대로 봄이 오려나 보다 생각할 즈음 눈이 쏟아져 산천을 다 덮고 말았다.한꺼번에 쏟아진 눈. 밤새 오고 낮에도 계속 쏟아지는 눈을 보며 또 사람들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이 막상 오니 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봄이 오려나... 해는 자꾸 짧아져 가고 봄은 자꾸 멀어져 가고 겨울은 깊어만 갔다.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정녕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겨울은 가고 있었고 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있었다. 해가 조금씩 길어지고 나무 끝에 움이 조금씩 커져 가고 태양은 따스한 바람을 날려 보내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봄이 언제인가 오리라 믿게 되었다. 지난가을도 겨울도 잊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봄이 겨울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은 채로 봄을 맞고 있다. 나무가 많은 우리 집 뒤뜰에도 봄이 오는지 나무들끼리 소곤소곤 수다를 떤다. 아무리 겨울이 가기 싫어도 별수 있냐며 나무들은 나날이 푸른빛을 띄우며 생기가 돋는다. 아직도 눈은 허리까지 쌓여있고 눈으로 보기에는 한겨울이지만 해도 길어졌고 바람도 겨울의 칼바람과는 다른 바람이다. 영하의 날씨라도 봄이 오는 것하고 겨울이 오는 것 하고는 마음이 천지차이다. 겨울이 올 때는 괜히 마음조차 움츠러드는데 봄이 오는 이맘때에는 눈이 와도 날씨가 추워도 그리 걱정이 안 된다. 봄이 온다 해도 특별히 변하는 것이 없는 현실이지만 겨울이 유난히 긴 이곳이라서 하찮은 봄바람에도 이유 없이 설렌다.
햇살이 너무나 좋아 뒤뜰에 나가니 나무들이 나를 기다리기나 한 듯 나를 쳐다본다. 사과나무도 전나무도 반가운지 바람이 불 때마다 손을 흔든다.뒷문 옆에 서 있는 앵두나무도 담에 서 있는 마가목 나무도 반갑다고 팔을 흔들어 댄다. 우리가 이 집에 산지가 31년째다. 매일 오가며 만나는 나무들이지만 이렇게 하얀 눈을 덮고 서 있는 나무들이 새삼 사랑스럽다. “그래 그래, 고맙다 나무들아." 우리가 사는 집을 그 오랜 세월 잘 지켜주고 감싸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으로 나무 하나하나를 쓰다듬어주며 감사함을 전했다. 맛있는 사과를 해마다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사과나무 들, 은은한 냄새를 풍기는 연보라색의 라일락꽃, 여름 내내 뒤뜰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예쁜 빨간 장미꽃들 그들과 함께 한 세월이다.
서향집이라서 겨울에는 햇빛이 들어와 집안이 따스하다. 남쪽으로 난 창문으로 사과나무가 보인다. 까치밥으로 남겨둔 몇 개의 사과가 험난한 겨울을 난 모습으로 피곤한 듯 매달려 있다. 여름에는 해도 길고 뒤뜰도 넓어서 나와 있는 시간도 많지만 겨울엔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밖에는 나무들을 볼 새가 없다. 오랜만에 그들을 바라보며 지난 세월들을 생각해 보며 참으로 많은 추억들을 생각해본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조그만 사과나무와 앵두나무 한 그루씩 사다가 심었는데 이제는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아이들이 이 집을 사서 이사오던 날 이층으로 아래층으로 신나서 뛰어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벌써 아들 둘은 아빠가 되었다. 다섯 식구가 어울려 재미있게 살던 집이 이제는 아이들이 다 분가해 우리 둘만의 터전이 되었지만 아직은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때로는 우리 둘 사는데 너무 큰 듯 하지만 어쩌다 식구들이 다 모이는 명절에 손주들이 맘껏 뛰어놀고 아이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다. 겨울에 눈을 치거나 여름에 잔디를 깎을 때는 남편이 조금씩 힘들어하지만 자식같이 듬직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몇 년 전 큰 전나무 하나가 비실비실 하더니 죽었다. 죽어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 잘라버렸는데 어찌나 서운한지 한동안 맘이 힘들었다. 나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마치도 사랑하는 자식 하나가 밖에 나간 듯하여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다. 꽃 하나 나무 하나도 그렇듯이 식구가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녹지 않고 쌓여있는 눈이야 햇빛이 나면 금방 녹을 것이지만 정작 우리가 봄을 만나는 때는 오월 하순이다. 갑자기 겨울이 가기 싫다고 심술을 부리며 눈을 뿌리면 꼼짝없이 앉아서 당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5월 말이나 돼서 씨를 뿌린다. 세상이 여름을 맞으려 할 때 나무에 아주 조그마한 새싹이 돋아나고 사과꽃과 앵두꽃 그리고 체리꽃이 핀다. 꽃샘추위로 봄마다 몸살을 앓지만 고맙게도 벌들이 날아와서 해마다 열매를 맺는다. 언제 올지 모르는 봄이지만 해마다 겨울은 새로운 봄을 가져다준다. 쌓인 눈밑으로 살금살금 기어 오는 봄 속에 어느새 참새들은 왁자지껄 하다. 까치들도 오랜만에 봄 마람을 쐬고 싶은지 날개를 활짝 열고 날아다닌다. 토끼들도 봄이 어디쯤 와 있는지 궁금한지 토끼 발자국이 눈 위에 선명하다. 이토록 기다리는 봄을 언제 겨울이 데려다 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