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하지 않아도... 반겨주는 숲이 있어 좋다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바람이 심하게 분다. 봄은 왔는데 겨울이 가기 싫은지 생떼를 부린다. 세상이 뒤집힐듯한 바람이 분다. 온 집들의 창문이 들썩 거리며 떠들어 댄다. 키 큰 나무들도 허리가 휘어지듯 앞으로 뒤로 춤을 춘다. 사람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듯이 나무들이 바람에 못 이겨 난리가 났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낡은 이파리도 남의 집 뜰을 구경하러 바쁘게 돌아다닌 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서 산책길이 촉촉하게 젖어 있고 심하게 불던 바람으로 숲은 초토화가 되었다. 죽지 않은 척하며 서있던 나무들은 뿌리째 뽑힌 채 궁둥이를 버쩍 들고 누워버렸고 기대고 서있던 나무들은 널브러진 채 포개져 있다. 뿌리가 세월을 이야기하며 하늘을 향하고 있고 그나마 근근이 목숨이 붙어 있었던 병든 백양나무는 미련 없이 쓰러진 채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그동안 좋은 세월이 오기를 기다리던 노송도 허리가 꺾인 채 전나무에게 안겨 버렸다. 더 이상 살 수 없던 나무들이 심하게 불어오는 바람에게 완패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성난 바람을 이겨낼 장사가 없다. 이제 숲에 남아서 비실대던 나무들은 안녕을 고하고 편하게 누웠고 어린 나무들은 멋도 모르고 바람 따라 춤을 추기만 한다. 겨울 동안 약해진 나무들이 겨울을 나지 못하고 그냥 누워 버렸다. 새들이 놀러 와도 다람쥐가 놀러 와도 꼼짝을 안 한다. 며칠 동안 풀어졌던 날이 계곡을 녹여 물이 넘쳐 오솔길로 넘쳐버렸다. 빙 돌아서 다른 길로 가본다. 수달이 나와서 놀 때가 되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여전히 심하게 불어 대고 나무들은 수다를 떤다. 이대로 바람이 더 불면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는 나무가 많을 거라며 쑥덕거린다. 그래도 막을 수 없는 바람이라면 불고 싶은 대로 불게 하는 수밖에 없다며 부는 대로 흔들어댄다.


숲의 수다 소리는 엄청나다. 여러 종류의 새들이 각기 다른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나무는 나무대로 끼리끼리 쑥덕거린다. 가만히 있던 계곡의 물들도 먼저 흘러가겠다고 앞을 다투고 절벽에 있던 흙도 계곡을 향해 내려온다. 아무런 소리도 없을 줄 알았던 숲 속에는 온통 수다쟁이들이 살고 있다. 어느새 날씨가 따뜻해졌다고 숨어 살던 개미도 살금살금 들락 거리고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오르락내리락 살 궁리를 한다. 먹을 것도 없는데 다람쥐들은 무엇을 찾으려고 저 난리를 치며 나무를 오르내리는지 모르겠다. 연애를 하는지 서로 쫓아다니며 장난을 친다. 침엽수들은 예쁜 초록색으로 새 옷을 입고 서 있지만 활엽수들은 여전히 죽은척하고 음흉을 떨고 있다. 어느 날 '까꿍 하며 파란 옷을 입고 놀래 줄 것이다. 봄이라고 해도 북향에는 아직도 하얀 눈이 쌓여있고 계곡에도 얼음이 둥둥 떠내려오기도 한다.



(사진:이종숙)


하늘은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계곡물에서 청둥오리 한쌍이 한가한 봄을 맞는다. 어젯밤에 내린 비로 계곡물이 급하게 흘러가고 어디선가 흘러온 나무가 계곡 한가운데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겨울이 길어 봄을 만나지도 못하고 보내야 하던 때도 있었지만 봄은 혼자서도 잘 논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거나 말거나 꽃을 피고 지며 왔다가는 봄을 올해는 조금 일찍 볼 수 있어 좋다. 한국처럼 개나리 진달래를 볼 수 없고 벚꽃도 목련꽃도 만날 수 없어도 뒤뜰에서 해마다 봄을 가져다주는 앵두꽃과 사과꽃이 봄을 만나게 해 준다. 아직은 꼼짝도 않고 있어도 모른 체하고 있으면 어느 날 활짝 웃으며 봐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봄인지 여름인지 모르는 계절이 왔다 가고 나면 썰렁한 가을이 오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아직 봄도 오지 않았는데 가을이 생각나는 이유는 어제 내린 비로 온도가 뚝 떨어져서 어젯밤에는 영하권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 아침에 산책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릴 정도로 쌀쌀해서 털모자에 장갑까지 끼고 산책을 하였다. 한참 걷다 보니 앞에 개구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람이 왔다 갔다 해도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사진을 몇 방 찍었다. 오래 살았지만 개구리를 숲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아이들 몇 명이 이쪽으로 오길래 개구리가 있다고 했더니 뛰어가서 본다. 계곡이 가까이 있으니 있을 법도 하지만 꼼짝 않고 죽은 듯이 있는 모습이 길을 잃은 듯 갑자기 산책길로 접어들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 같다. 언제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게 숲은 화창하다. 하늘은 파랗고 뭉게구름이 꽃처럼 여기저기 피어난다. 평화로운 숲 속에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


혼자 피고 지는 나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잘난 체도 하지 않고 키가 크다고 자랑도 하지 않는다. 이파리가 많다고 내세우지도 않고 키가 작고 가늘다고 얕보지도 않는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기죽지도 않고 늦게 꽃을 피운다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할 일을 하며 욕심 없이 살다 간다. 커다란 나무가 길가에 넘어져 있다. 적어도 100살은 넘어 보인다. 누군가가 나이테를 세어보았는지 볼펜으로 금이 그어져 있다. 남편도 신기한지 열심히 세어본다. 가야 할 곳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반겨주는 숲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품어주고 나랑 놀아주는 숲에서 세상을 잊으며 다람쥐와 새와 오리들을 본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약속을 해야 하는 시대이지만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숲이 있어 좋다. 어제 오고 또 와도 여전히 반겨주는 숲이 있어 좋다.


하늘을 품은 계곡물에서 오리가 논다.(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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