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닭죽 먹고 노는 날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밤새 비가 와서 그런지 5월 중순인데 춥다. 오늘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고 내일 아침에는 눈도 온다는 예보다. 며칠 전에 뿌린 씨들이 땅을 뚫고 파릇파릇 나오는데 반갑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해마다 비껴가지 않는 마지막 눈이라서 그러려니 한다. 미리 씨를 뿌린 게 잘못이지 날씨 탓을 할 필요가 없다. 밤새 온 것도 모자라서 비는 여전히 내린다. 잔디는 파랗고 나무들은 신나게 자란다. 온갖 초목들이 세상을 초록색으로 물들이는데 싹이 얼을까 봐 조바심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 날씨가 추워서 얼면 다시 심어도 늦지 않고 안달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데도 창밖을 내다보며 구시렁거린다. 봄이 안 온다고 봄이 늦게 온다고 투덜대더니 봄이 왔는데 날씨가 춥다고 불평한다. 그래도 자연은 못들은 척하며 할 일을 한다. 비를 뿌리고 바람을 불어대며 세상을 돌본다.


사과꽃이 안 필까 봐 걱정을 했는데 하루 사이에 만발했다. 보기 좋아서 사진을 찍으며 예쁘다고 했는데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벌들이 오지 못하는데 왜 비가 오냐며 하늘을 본다. 하늘은 구름을 잔뜩 물고 세상을 적신다. 메마른 산천이 물을 마시고 생기를 찾으며 행복해하는데 나는 손톱만큼 나오기 시작한 새싹이 얼어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게 놔둬야지 뭐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침을 먹고 평소 같으면 산책을 나가는 시간인데 비가 오니 걸을 수는 없지만 차를 타고 장을 보러 한인 마트에 들렸다. 며칠 전 날씨 좋은 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기다리기 싫어서 그냥 집으로 왔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아주 한적하다. 커다란 대형 마트라서 한국사람만 오는 게 아니라서 늘 바쁘다.


생긴 지 2년 정도 되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주 가지 않는 곳인데 오늘은 시간도 많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시간 때울 겸 여기저기 꼼꼼히 살펴보고 싶었는데 막상 들어가니 실내가 너무 추워서 간단하게 살 것 몇 개만 사고 나왔다. 매일 새로운 것들이 나와 올 때마다 사다 보면 먼저 산 것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장을 보러 가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비가 오는데도 길거리에는 차가 많다. 다들 일이 있어서 나왔겠지만 사람들이 집에 가만히 있기가 심심한가 보다. 아침에 점심으로 닭죽을 먹고 싶어서 슬로우쿠커에 닭 한 마리와 인삼과 대추와 마늘을 넣어 놓고 나갔다 왔더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구수한 냄새로 환영한다. 특별히 해 먹을 게 없을 때 몸보신 겸해서 먹는 음식인데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 먹기는 아주 좋다.


(사진:이종숙)


어릴 적 몸이 약한 나를 위해서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음식이라 그런지 먹고 나면 속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져 자주 해 먹는다. 별로 손이 가지 않고 입맛이 없거나 기운이 떨어진 것 같을 때 약 병아리 하나 넣고 푹 익혀서 먹으면 입맛도 돌아오고 괜히 기운도 생기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옛날에 먹던 음식이 그리워진다. 형제들이 많아 닭 한 마리 넣고 커다란 솥에 삶아 주셨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여덟 식구가 동그란 상에 둘러앉아 닭죽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먹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코로나는 언제 가는지 요지부동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오늘 오는 비가 다 씻어내 버렸으면 좋겠다. 끓여놓은 닭죽이 쪼글 뽀글 끓어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추어 싱싱한 부추무침과 함께 먹고 났더니 식곤증이 오는지 졸음이 쏟아진다. 창밖에서 짹짹거리던 참새들도 나무속에 쪼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는지 조용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게으른 사람 잠자기 좋고 부지런한 사람 일하기 좋다던 집안 아주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일이라는 것이 찾아내서 하면 한도 끝도 없고 덮어두면 그대로 어딘가에서 소리 없이 쌓인다. 날씨 좋은 날은 밖에 나가 놀기 바쁘고 궂은날은 뒹굴뒹굴하다 보면 밀린 일이 산더미가 된다. 놀 때 놀더라고 해야 할 일 은 해야 하는데 사람이 안 그렇다. 미리미리 하면 좋은데 코앞에 닥쳐야 하게 돼서 걱정이다. 인생은 언제나 숙제가 있고 숙제를 해야 하는데 미루다 보면 나중에 한꺼번에 하며 고생한다. 나에게 남겨진 숙제를 마감 날짜까지 열심히 하다가 잘 끝내고 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몇십 년이라는 시간을 주는데도 하루 이틀 미루고 세월만 까먹고 살다가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남은 시간 동안 조금씩 해야 하는데 오늘도 나는 딴청을 부린다.


먹고 자고 놀며 세월을 보내니 걱정이다. 걱정할 필요 없이 하나씩 하다 보면 되겠지만 비 오면 비 온다고 바람 불면 바람 분다고 여기저기 참견하기 바쁘다. 심심해서 안 하고, 바빠서 안 하다 보면 가야 할 시간이 오는 줄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비 오는 밖을 내다보며 등 굽은 소나무를 바라본다. 솔방울이 제법 커지고 이 비가 그치면 송화가루가 노랗게 피어나리라. 아무리 숙제가 중요하지만 오늘 같은 날 노는 것도 중요하다.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맛있는 닭죽을 먹으며 쏟아지는 봄비 구경이나 한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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