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아침이다. 시계 소리만 똑딱거린다. 외가댁에 간 손주들이 없는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아침부터 콩콩거리며 층계를 오르내리고 눈 뜨자마자 우리 침대로 올라오는 손주들이 없어서 오늘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 대는 새들도 오늘은 출장을 갔나 보다. 손주들과 생활하다 보니 시끌 시끌한 것이 일상이 되어간다. 아침잠이 없는 나는 일찍 일어나 하루 할 일을 대충 한다.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며 정리할 것 하다 보면 아침 식사 시간이 된다. 한 가지를 계속할 수 없어 조금씩 밀린 것을 하면서 하루를 계획하는데 내 시간이 없는 요즘엔 하루에 글 한 편 쓰기도 바쁘다. 시간을 쪼개서 손주들이 텔레비전 볼 때를 이용해서 조금씩이라도 쓰고 밀린 일을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정말 너무 많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밀린 브런치를 체크하고 며칠 전에 시작한 그림을 그린다.
숲에 서있는 나무들을 그려본다. 조금씩 물들어가는 몇 그루의 나무를 그려 넣고 벽에 걸어본다. 나무 몇 그루 더 그려 넣으니 훨씬 보기 좋다. 추상적인 숲에 온 듯하다. 어떤 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막상 그리면 마음대로 안 되고 머릿속에는 근사한 그림이 있는데 페인트의 농도에 따라 변한다. 생각으로는 멋진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아 붓을 잡고 시작을 하는데 결과는 별로인 경우도 있다. 독학으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라 기초가 부족해서 인지 잘되다가 안되고 안되다가 잘되기도 한다. 때로는 잘 안돼서 실망을 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아서 그린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를 채워 나가는 순간들이 좋다. 무념무상이 되고 한 가지에 몰두하며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언가를 그리다 보면 환희를 느낀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희열이 생긴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나만이 할 수 있는 오직 나만의 공간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그려도 보는 시각과 초점에 따라 다르게 그린다. 같은 페인트를 가지고 그려도 배합에 따라 다른 색깔이 나오고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쉽게 그려지기도 하고 오래도록 작품이 안 나오기도 한다. 눈으로 보고 그리기도 하고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점 하나를 찍어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수많은 선으로 인간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도 그리다 보면 생각지 못한 걸작이 나오기도 하고 마음을 정하고 그리다가 망치기도 한다. 잘못 그리면 다시 그리면 되고 마음에 들면 벽에 걸고 감상하면 된다. 세상만사 완벽한 게 없다. 졸작이 걸작이 되고 걸작이 졸작 일수도 있다. 잘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장단점을 찾아내지만 글과 그림은 자연스러운 게 좋다.
명작이 오래도록 사랑을 받는 이유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명작은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고 은근한 매력이 있다. 오래전 식당을 운영할 때 자주 오던 단골손님이 생전에 그분의 엄마가 그린 그림이라고 가져와 보여주며 선물로 주고 갔다. 꽃을 좋아하던 분이라서 꽃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든 게 귀하던 시절이어서 물감도 어렵게 구하고 아껴서 쓰며 그린 그림인데도 생화같이 그려서 감탄했던 적이 있었다. 집에서 살림하며 시간을 쪼개어하고 싶은 그림을 그렸을 그분의 엄마가 그려진다. 꽃잎 하나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진짜 꽃 같아서 향기가 풍기는 듯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자연과 가장 가까운 마음으로 그렸을 것 같다. 아무리 값비싼 재료를 쓴다 해도 도화지에 그린 그녀의 그림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분이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고 가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분의 그림은 아름답다. 물질 만능의 세상에서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고 살아가는데 돈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게 있음을 알게 된다. 여유롭지 않은 환경 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면서 하루하루 살았을 그분의 꽃그림은 지금도 그 식당 벽에 걸려 많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향기를 전할 것이다. 꼬맹이들이 없으니 한가로이 이런저런 추억에 잠긴다. 아이들은 든든한 맛에 기다려지고 손주들은 귀여워서 그립다. 보고 또 봐도 예쁘고 보고 싶다. 외갓집에 간지 하루도 안되었는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웃고 울던 모습이 생각난다. 쫓아다니다 보면 한숨 자고 싶기도 하고 앉아서 드라마도 보고 싶은데 잠시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일찍 침대에 들어가 누워 있으면 바로 쫓아와 침대에서 뛰며 놀자고 한다. 꼬맹이들 노는 모습이 자면서도 생각이 나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식구들이 많고 놀거리가 많으면 아는 체도 안 하고 무시하는 모습이 너무 웃긴다.
조그만 녀석들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시시해 보이는지 본체만체하다가 아무도 없으면 달라붙는다. 맛있는 과자를 주면 가까이 오고 엄마 아빠가 없으면 다가온다. 매일 밥해주고 달래주는 할머니를 우습게 보아도 그들이 사랑스럽다. 손주들은 그들의 세계로 나를 데리고 다닌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다 보면 나는 자연이 된다. 꽃이 좋고 나비가 좋다고 말하는 손주들이 있어 그리움을 배우고 사랑을 한다. 오늘은그리움을 담은 자연을 그리며 한가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