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찾아오지 않았다고 숲이 화가 났는지 어느새 옷을 갈아 입고 떠날 채비를 한다. 멀리서 보기에는 아직 새파란 청춘인데 가까이 가보니 듬성듬성 새치가 생겼다. 들판을 덮었던 들꽃들이 다 지고 산딸기 몇 개 남아서 숲 속을 지킨다. 며칠 전에 온 비로 계곡은 물이 많아졌고 계곡은 갈길이 바쁜지 서둘러 흐른다. 한여름 더위에 물도 더워 메말랐는데 성장을 멈춘 산천초목들이 목이 마르지 않다고 그냥 가라 고 하는지 햇볕을 받아 흐르는 물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며칠 오지 않았더니 숲 속의 오솔길이 좁아졌다. 위로 자라던 풀들이 길가로 누워있고 빽빽하던 숲이 차분하다. 이파리들이 하나둘 떨어져 뒹굴기 시작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던 나무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숲 속이라 아직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조석으로 찾아오는 가을 때문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너무 더워서 모기도 없던 올여름이었는데 가을이 오고 있다.
메마른 땅에 하나둘 싹이 올라와 온 산을 다 덮더니 하나둘 스러져간다. 얼은 땅을 뚫고 나와서 나 좀 보라며 서있던 삼나물과 참나물이 씨를 다 떨어뜨리고 메마른 몸으로 서 있는 그들은 눈이 오면 눈 속에 파묻혀도 고고한 자태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돌아서면 보이고 걷다 보면 보이던 산나물들은 어디선가 다시 오는 봄을 준비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준비를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어느새 숲은 겨울 준비를 하고 있다. 구석에 넘어져 있는 나무들은 버섯을 키우고 있고 기운이 다한 나무들은 비스듬히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서 있다. 바람이 불으면 여름내 끼고 있던 이파리를 떨구며 가벼워진 몸으로 가을을 맞는다. 가져가지 못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가기 전에 단풍으로 다시 한번 꽃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먼저 핀 것들은 먼저 가고 나중 핀 것들은 가을을 만나고 간다.
한 나무에서 같이 살아온 이파리라도 먼저 떨어진 것도 있고 곱게 물들어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있다. 짧은 옷을 입어도 얼굴과 등으로 흐르던 땀이 긴 옷을 입었는데도 흐르지 않는다. 영상 30도가 훨씬 넘던 온도도 20도 아래로 떨어지고 바람도 차다. 더위를 피해 숲 속을 찾던 동네 사람들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숲 속의 오솔길이 가을로 꽉 차오고 있다. 하늘 높이 부지런한 오리가 먼길을 떠나는 것을 보니 정령 계절은 거스르지 못한다. 다른 곳보다 늦게 오는 봄이 원망스러워 징징댈 때가 엊그제인데 벌써 가을이 온다고 투덜댄다. 사람들은 언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넘치고 흘러도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만족하지 못하며 산다.
(사진:이종숙)
지난겨울 길을 막고 쓰러져 있던 나무는 누군가의 발길로 더 아래로 내려가서 누워있고 남편과 내가 걸으면서 명당자리라고 이름 지워 놓은 오솔길은 여전히 지나가는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뒤로는 따스한 언덕이 있고 앞으로는 평화로운 계곡이 흐른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숲을 메우고 있어 명당의 요소를 다 가진 것 같은 곳이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바람은 부드럽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만나서 반갑다고 속삭인다. 숲 속에서 산나물을 뜯을 때는 하나라도 더 뜯기 위해 땅만 보고 걸었다. 젊어서 돈을 더 벌어 보려고 열심히 일만 하느라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더니 지금에 와서는 그게 후회가 된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세월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세상을 보여준다. 모르던 것을 가르쳐주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한다. 조금 늦어도 화내지 않고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 자연을 닮고 싶다. 내 마음대로 안돼도 절망하지 않고 괜한 걱정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싶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나뭇잎이고 싶다. 걱정도 근심도 욕심에서 온다. 원하는 대로 안되기에 속을 끓이는 것이다. 자연을 보자. 자연은 욕심도 없고 으스대지도 않는다. 예쁘다고 잘난 체하지 않고 멋있다고 다른 것들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자라고 풀과 꽃들이 의지하며 피고 진다. 어제 원하던 오늘이 아니어도 오늘 원하는 내일이 오지 않아 도 다시 오고 머물다 가는 계절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흐르는 계곡에 나뭇가지가 겹겹이 쌓여서 흐르는 물이 돌아서 간다.
가는 길이 힘들어도 먼저 흘러간 물을 따라서 간다. 가는 길이 험하고 힘들어도 앞서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흐르는 대로 가면 된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고 느리다고 건너뛰지 않는다. 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어 숲에 사는 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