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서리가 하얗게 내려 걸을 때마다 잔디가 서걱서걱한다.잔디 위에 앉은 서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다 금방 녹아 물이 되고 말라 사라져 버린다. 잠깐의 눈부신 햇볕을 만나는 순간을 위해 기다려온 서리는 자취도 없이 생을 마감한다.
무심하게 잔디를 밟고 하늘을 본다. 온도가 내려가는 만큼 하늘은 높아지고 나무들은 옷을 벗으며 온몸으로 햇살을 받는다.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나뭇가지들이 햇볕을 받아 따뜻하다. 나뭇잎이 없으니 햇볕이 쉬었다 가는 시간이 길어진다. 더울 때는 잎으로 땀을 식히고 추운 겨울에는 햇볕으로 몸을 녹인다.
심심한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여기저기 앉아서 세상 구경을 하는 모습이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는 나와 같다. 쓸쓸한 가을이다. 싱싱하던 텃밭의 채소는 작별을 고한 지 오래되어 누런 파들만 이리저리 누워서 텃밭을 지킨다.
꺽다리 해바라기는 까만색 씨를 물고 서 있고 사과들은 뛰어노는 손주들 볼처럼 빨갛게 익어간다. 지난봄에 앞뜰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는 여름내 무엇을 하느라 자라지 않더니 이제야 꽃을 피운다. 꽃도 못 피고 죽나 보다 했더니 가을빛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꽃들이 다 떨어지고 떠난 지금 꽃밭 한쪽 구석에서 노란 꽃을 피우며 자랑스럽게 서있는 해바라기를 보니 특별하지 않게 살다 느지막이 전성기를 맞으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 전 남편이 정원을 정리하며 남겨둔 키 작은 해바라기가 이제야 꽃을 피워 쓸쓸하던 정원이 환하다. 꽃을 피지 못한다고 뽑아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꽃처럼 사람도 누구나 때가 있고 재능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꿈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피게 되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단정하여 체념하고 결국 재능을 찾지 못한 채 가는 사람이 많다. 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가슴에 씨를 뿌리고 밭을 가꾸다 보면 언제가 커다란 꿈이 실현된다.
꿈을 향해 걸어가고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찮은 해바라기도 꽃을 피워내기 위해 그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고 서리 내리는 늦가을이라도 꽃을 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비가 와도 해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꽃을 피기 위한 염원으로 뜨거운 여름을 버티었을 것이다.
(사진:이종숙)
다른 해바라기보다 키가 작아도, 꽃이 많지 않아도, 한송이 해바라기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온 것이다. 그 옆에 있는 더 작은 해바라기도 덩달아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봉우리를 만들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치어 넘어진 것을 죽은 줄 알고 뽑아버리려다 그냥 놔두었더니 봉우리가 생겨난다. 처마 밑이라 서리를 피할 수 있는지 아직 괜찮다. 며칠 있으면 꽃을 피울 듯이 노란 꽃잎들이 속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신기하다.
보기 싫다고, 시들었다고, 무심코 뽑아버리는 꽃들도 생명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다.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도, 백 년을 살아가는 인간도, 한번 왔다 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길고 짧은 차이일 뿐 왔다 가는 것은 같다.
17년이라는 긴 시간을 준비하며 세상에 오는 매미나 한순간의 반짝임을 위해 밤새 추위에 떨어야만 생겨나는 이슬이 다를 게 없다. 지난여름 앞뜰에 있는 소나무가 꽃을 피는 것을 보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소나무 꽃은 100년에 한 번 핀다고 한다. 100살짜리 소나무는 아닌 것 같은데 꽃이 핀 것이 너무 신기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사람이나 꽃이나 다 아름답다. 시시한 사람도 없고 가치 없는 꽃도 없다. 늦게 핀 해바라기 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가을이 오기 위해 온 나무에 단풍을 입히고 겨울이 오기 전에 자연은 비와 서리를 내리며 계절을 준비한다.
할 일이 없다고 심심하다고 투정 부리고 게으름 피울게 아니고 짧아져가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한다. 찾아보면 할 일이 태산인데 내일 내일 미루며 준비 없이 산다. 서리가 오면 겨울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 눈이 내릴 텐데 시간이 얼마라도 남았을 때 할 일을 찾아서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자.
쓸쓸한 가을만 탓하지 말고 추워지기 전에 해야 할 것을 찾아봐야 한다. 몇 개 남은 단풍잎을 매달고 서 있는 자작나무에 해마다 크리스마스 전구를 돌려서 나무를 장식한다. 미리미리 하면 좋은데 늘 추운 날 달달 떨면서 했는데 올해는 따뜻할 때 해야겠다며 남편은 서두른다. 코로나로 쓸쓸한 추수감사절을 맞고 보내며 다가오는 성탄절은 가족이 모두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같이 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