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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콤 달콤한... 추억의 늙은 오이무침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가뭄이 오래도록 이어진 여름이라 빨리 가기를 원했는데 가고 나니 그리운 여름이다. 다행히 올해는 인디언 서머 덕분에 가을을 만끽하며 산다. 조석으로는 겨울이 가까운 온도라 춥지만 낮에는 청명하고 따뜻하다.


여름이 짧은 이곳은 오이 농사가 잘 안된다. 오이는 물을 많이 줘야 하는데 비가 오지 않고 폭염이 잇따라 꼭 필요한 물 외에는 물을 쓰지 말라는 정부지침이 있어 올해는 오이 농사를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며칠 전 친구가 텃밭에서 농사지은 늙은 오이를 몇 개 가져다주었다.


가뭄 속에서도 실하게 자라 살이 통통 오른 누런 오이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껍질을 벗겨서 채를 썰어 고추장에 무쳐 밥을 비벼먹고 싶다. 서울에서 자라서 어쩌다 먹는 시골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늙은 오이를 보고 사진을 찍으며 노각 무침을 맛있게 해 먹을 생각으로 설렜다.


시집 온 첫 해 요리를 잘 못해서 시댁에 자주 가서 밥을 먹었는데 마침 하루는 시어머니가 시장에서 팔뚝만 한 누런 늙은 오이를 몇 개 사 오셨다. 저걸로 무엇을 하려나 궁금했는데 어머니는 신문지 몇 장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오이를 놓으시고 칼로 오이 껍질을 깎기 시작하셨다.


껍질을 깎고 반을 자르니 뽀얀 살이 오동통 찐 매끈한 오이 속에 씨가 꽉 차 있는 게 보였다. 씨를 빼고 채를 썰어 커다란 양푼에 오이를 넣고 소금을 뿌리고 다독거려 놓으셨다. 얼마 뒤에 힘을 빼고 풀이 죽어 축 늘어져 있는 오이를 씻어 헹궈 물을 꼭 짜서 양념을 하신다.


양념 이라야 특별한 것을 넣지도 않았다. 그저 고춧가루, 소금과 생강 마늘 그리고 설탕 한 숟가락에 고추장을 넣고 섞으니 속살처럼 뽀얗던 오이가 빨갛게 옷을 입으며 맛있게 변해 있다. 송송 썰은 파와 참기름 한 방울 그리고 깨소금을 넣고 한번 뒤집어 주니 근사한 노각무침이 되었다.


노각 무침은 어머니의 주특기라서 특별히 하신 요리로 온 식구가 맛있게 먹은 게 43년 전 일이다. 그동안 늙은 오이를 먹을 기회도 없고 이곳에서 살 수도 없어 노각무침이 생각나면 굵은 오이를 껍질을 벗겨서 노각무침 흉내를 내며 해 먹었는데 오늘은 진짜 노각이 생겼으니 어머니 레시피로 한 번 실력 발휘를 해 봐야겠다.


오이를 감자 깎기로 얇게 껍질을 벗기고

반씩 잘라서 씨를 긁어낸다.

오이를 곱게 채를 썰어 소금에 살짝 절여놓는다.

절여진 오이를 깨끗이 씻어 물을 뺀다.

손으로 꽉 짜서 그릇에 담는다.

고추 가루을 넣고 조몰락거린다.

오이가 빨갛게 옷을 입으면 생강과 마늘

그리고 고추장과 설탕을 한 숟가락씩 넣고

조물조물해준다.

절여진 오이라서 소금은 필요 없지만

간을 보고 필요하면 소금도 넣어준다.

마지막으로 파와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한번 뒤집어주면 맛있는 노각 무침이 된다.

밥에 노각무침을 넣고 비벼먹기도 하고

반찬으로 밥에 얹어 먹기도 한다.


특별한 음식은 아니어도 생각지 못한 늙은 오이 몇 개로 만든 노각무침은 나를 먼 옛날로 데려다 놓는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며느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밥맛이 없거나 상큼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 생각나는 노각무침 속에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
환상의 이맛을 어찌 잊으랴!!!


더운 여름에 새콤달콤한 노각무침으로 한 끼를 때우고 한겨울에 매콤 달콤한 노각무침 비빔밥을 먹으면 추위를 잊는다. 지방 위주의 현대 식단에 싫증이 날 때 한 번씩 해 먹으며 추억을 이야기한다.


(사진:이종숙)



https://brunch.co.kr/@chonglucialee/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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