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희망하며 산다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군데군데 허물을 벗은 땅이 봄을 준비한다. 길어진 해가 눈을 녹이고 시도 때도 없이 부는 심술궂은 바람이 춤을 추며 봄을 유혹한다. 어느새 3월이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온다는 3월이 되어도 특별히 하는 일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3월이 오면 그냥 좋다. 눈 쌓인 뜰을 보면 아직은 겨울이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쌓여있는 눈이 다 녹을 것 같다. 어느새 남쪽 땅에는 파릇파릇한 부추가 땅을 헤집고 나오는 게 보이고 나무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수줍은 듯 조금씩 나오는 움들이 나날이 커지고 사람들의 옷은 점점 가벼워진다. 희망을 품은 봄은 무언 속에 다가와서 인간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혹독한 겨울을 잊게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은 우리의 마음을 자라게 하여 봄을 맞으며 감사하게 한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희미해진 꿈처럼 겨울은 추억 속에 묻힌다. 과거는 그렇게 흘러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생각하면 생생하게 어제 일처럼 생각나는 것도 있고 까마득하게 잊힌 것도 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가서 아름답고 다가오는 날들은 알지 못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오랜 날들 알아왔던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몰라볼 정도로 연로해졌다. 하루하루가 모여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젊음을 데려가서 전혀 다른 모습을 남긴다. 허리가 굽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이민 초기에 만나서 동고동락하며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서 인지 그냥 만나기만 해도 반갑다.


많은 이민 선배들이 귀도 잘 들리지 않아 전화도 못하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카톡도 잘 못하게 되어간다 는 말을 들으며 세월이 흐름을 막지 못함을 실감한다. 세월이란 게 무엇인지 살아도 살아도 모르겠다. 깜박 깜빡해서 종종 해야 할 말을 잊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한다. 간밤에 열심히 꾸었던 꿈도 일어나자마자 잊혀서 생각이 안나는 것처럼 젊음은 꿈속으로 사라져 버린 모습을 본다. 그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 잘나고 못난 사람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없고, 배우고 못 배운 사람 없다는 노년의 길로 들어서서 함께 걸어간다. 같이 놀았던 그 시절의 끝나지 않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 함께 손잡고 간다. 내일을 향해 걸었기에 지금을 만날 수 있다.


삶은 한없이 흐르는 강물 같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간다. 가다 보면 어디선가 흘러온 나뭇가지도 만나고 바위 돌도 만나지만 멈추지 않고 돌아서 가고 피해서 간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간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길을 찾아서 간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도 인연이다. 피하면 피할수록 가까워지는 인연의 끈은 인간의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살다 보면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고 끝나지 않고 못다 한 인연이 이어진다. 하늘이 회색이라도 구름이 걷히면 파란 하늘이 되듯이 세월의 강물을 따라가다 보면 희망의 바다에 닿는다. 기운이 쇠하여 도착하지 못하고 도중하차를 하게 되어도 희망 속에 살아간다.


의미 없는 삶이 없고 이유 없는 죽음이 없듯이 많은 날들은 하루가 되고 하루는 긴 세월을 만든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억울해할 필요 없다. 내게 올 세월을 막지 못하고 내게서 떠나가는 세월 또한 잡지 못한다. 노인들을 보며 어쩌다 저렇게 늙었나 했는데 나도 별 수 없다. 세월을 잡으려 하지 말고 세월을 쫓으려 하지 말고 세월 따라 함께 동행하면 된다. 세상 그 누구도 세월의 강을 역류할 수 없는 게 진리다. 편견과 오해와 이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불협화음을 이겨내고 의견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는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조금씩 양보하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삶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간다.


가다 보면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시 가는 길을 따라간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지만 어떤 봄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이다. 땅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쟁취하는 살인마의 머릿속엔 그들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지 핵까지 들고 나온단다. 아이들을 살생하고 빌딩을 폭격하며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그들의 순간순간은 공포의 순간들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철면피가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죽으면 한주먹의 흙밖에 안 되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잔학한 것인지 상상이 안된다. 뺏고 빼앗기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들 결국 혼자 차지할 수 없다.


누구나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 떠나야 하는데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며 쌓아놓은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사상이 다르고 뜻하는 길이 달라도 한번 태어나 한번 살다가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나눌수록 커지고 움켜쥘수록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눈으로 보기에는 이긴 것 같지만 삶은 혼자만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게임이다. 봄이 왔다 가면 여름이 세상을 차지하고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 정의를 앞세우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들의 속셈이 보인다. 양심을 져버린 삶이 버젓이 이어지고 정도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대받는 세상이다. 해를 숨긴 구름이 언제 해를 내놓을지 아직도 세상은 어둡기만 하지만 내일을 기다리며 희망한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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