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겨울을 안고 오는 봄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봄은 겨울이 피곤해진 틈을 타서 온다. 눈을 다 쏟아낸 하늘은 파랗다 못해 눈이 시리다. 구름 속에서 숨어있던 해님이 세상을 비춘다. 봄이 오는 길은 어디일까 알 수 없지만 눈이 쌓여있어 봄이 보이지 않아도 봄이 온다. 봄은 눈을 맞으며 오고 비를 맞으며 온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을 따라오고 목청 높여 노래하는 새와 함께 온다. 눈이 그친 숲은 새날을 맞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매 순간 보이지 않게 변하며 계절을 맞고 보내는 숲 속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의 찬란하던 상고대는 없어도 뽀얗게 피어나는 움들이 햇살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바람도 자는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뜨리는 딱따구리가 죽은 나무를 찾아내어 벌레를 잡아먹는 소리가 들린다.


한쌍의 다람쥐가 연애를 하며 나무를 오르내린다. 참 재주도 좋다. 어찌 그리 나무를 잘 타는지 서커스 단원들 같다. 오르고 내리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눈이 많이 왔어도 봄이 다가온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계곡의 물은 아직 단단하게 얼어있어도 알게 모르게 녹고 있는지 산책길에 얼음이 많아 조심조심 걸어간다. 봄은 소식 없이 살며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겨울과 봄이 서로 밀당을 하며 겨울은 못 이기는 척하며 봄에게 자리를 건네주고 갈 것이다. 하얀 고깔모자를 쓰고 봄을 기다리는 마가목 나무 열매는 겨우내 주름살이 부쩍 늘었지만 멀리서 보면 참 예쁘다. 새들이 먹다 남은 열매들이 봄이 오면 말라서 떨어지고 하얀 꽃이 피고 지면 연둣빛 열매를 맺는다.


여름 내내 열매가 영글어 가며 가을을 맞아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주황색으로 곱게 물들다가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이 되면 빨갛게 익는다. 추운 이곳에는 아주 흔한 나무인데 꽃도 열매도 예쁘고 겨울에는 새들이 오고 가며 열매를 따먹는다.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많은 나무들이 넘어진 채 눈을 맞고 누워 있다. 가을에 멀쩡하던 나무가 쓰러져 옆 나무에 기댄 채 서 있기도 하고 어린 나무들이 추운 겨울을 견디고 부쩍 자라서 제법 의젓하게 숲을 지키고 서 있다. 계곡 옆에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지어놓은 나무집은 눈보라에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져 나뭇가지 몇 개만 뒹굴어 다니고 있다. 머지않아 누군가로 인하여 또 다른 집이 지어질 것이다. 숲은 한없는 가능성을 갖게 한다.


(사진:이종숙)

계곡 옆으로 오래된 나무가 하늘을 향하고 서 있어 바라보니 나뭇가지 위에 널빤지가 올려있고 끈으로 묶어 놓은 게 보인다. 저것을 만들며 웃고 놀던 아이들은 이미 중년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웃어본다. 오르락내리락하며 걸어가는 길가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나무들이 눈을 덮고 있고 햇살은 눈부시게 숲을 비춘다. 파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 하늘은 파랗고 맑으며 공기는 상쾌하다. 남편과 함께 앞서고 뒤서고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바로 이게 행복이 아닌가 한다. 멀리 여행을 가는 것도 좋지만 가까이 있는 이곳도 좋다. 사람들을 만나서 웃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좋지만 자연과 함께 대화하며 산책을 하는 것도 참 좋다.


비싸고 좋은 물건도 좋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언제나 반겨주는 숲이 있어 너무 좋다. 봄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언젠가는 올 것이다. 봄이 오는 길이 험난해도 봄은 눈 밑으로 오고, 땅속으로 오고, 비가 되고 눈이 되어 온다. 아니 어쩌면 봄은 이미 와 있는지 모른다. 봄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 기다리는 마음속에 와 있을 것이다. 저 눈이 다 녹으면 푸릇푸릇한 생명들이 앞을 다투며 얼굴을 내밀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삶은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아도 만나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 눈 속에서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생각하며 다가오는 봄을 맞을 준비를 하자.


어디를 바라봐도 걱정 근심이 넘친다.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원하는 일이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살이다. 나라마다 무언가를 원하고 반대하는 데모가 넘쳐나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커지고 상대를 죽여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코로나로, 산불로, 전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도 이렇게 겨울은 가고 계절은 바뀐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생각대로 되는 게 인생이다. 잘될 거라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하며 빛나는 하루를 맞자. 춥다고 웅크리지 말고 뜻대로 안 된다고 기죽지 말자. 봄은 겨울이 지나야 오는 것처럼 힘든 날들이 지나면 기쁨의 날이 온다. 좋은 면을 보고 좋게 생각하면 춥고 외로운 겨울 속에서도 봄을 만날 수 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길을 지나 숲을 빠져나오니 순백의 눈이 펼쳐있는 들판을 지난다. 들고 다니는 지팡이로 하얀 눈 위에 하트 모양을 그려본다. 사랑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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