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계절을 만난 날

by Chong Sook Lee



눈이 온다. 4월 말인데 주먹만 한 함박눈이 내려 파란 잔디를 하얗게 덮는다. 오는 봄을 방해하는지 가는 겨울을 놓아주지 않는지 한겨울처럼 눈이 쏟아진다. 봄비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눈이 와서 다시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괜찮아 눈이 오면 어때. 금방 녹을 텐데'. 하며 창밖을 내다본다. 눈이 온다고 겨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봄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봄에 오는 눈은 쌓이지 않고 알아서 녹는다. 계절을 거꾸로 돌릴 수 없고 눈이 오나보다 하다 보면 끝날 것이다. 엊그제 아침에 서리가 지붕에 하얗게 온 것을 보고 날이 추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눈까지 올 줄이야 몰랐다. 앞뜰에 서있는 나무들은 그까짓 눈... 하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물을 먹어서인지 오히려 더 파랗다.


자연은 성급하지 않고 화내지 않는다. 기다리고 인내하며 오고 가는 계절을 맞고 보낸다. 비바람이 불어서 가지가 잘리고 뿌리가 뽑혀도 누워서 하늘을 보며 나무 어딘가에 버섯을 키운다. 안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다. 지난해 봄 어느 날, 바람이 심하게 불어 숲에 있는 꽃사과 나뭇가지 하나가 꺾어졌다. 꽃이 한창 예쁘게 피어있던 가지였는데 가지를 땅에 대고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가지가 꺾였네 하며 지나치고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가보니 죽지 않고 꽃이 다 떨어진 자리에 사과를 매달고 살아 있었다. 어찌나 기특한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람 같으면 죽겠다며 불평하고 힘들어했을 텐데 나무들은 조용히 고난을 이겨내며 할 일을 한다.


이제는 그만 가도 억울하지 않으련만 겨울은 봄을 방해하고 심술을 부린다. 하루 종일 내릴 것 같던 함박눈이 진눈깨비로 변해 땅에 닿자마자 녹아서 물이 되어 버린다. 길은 비 온 것처럼 흥건하여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뽀얗게 일어나던 먼지를 잠재운다. 이렇게 날씨가 궂은날은 부지런한 사람은 일하고 게으른 사람은 낮잠 자기 좋은 날이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겨울과 봄이 다녀갔다. 물먹은 잔디는 더 파래지고 나무들은 이파리를 기르고 비를 피해 있던 새들은 촉촉하게 젖은 나뭇가지에 앉아 짝을 부른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계절은 우리를 계획하고 정리하게 한다.


(사진:이종숙)


비가 끝인 동네는 마치 세수한 얼굴같이 말끔하고 상쾌하여 동네를 걸어본다. 아침에 눈이 와서 나가지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점점 하기 싫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나오니 정말 좋다. 잔디가 더 싱그럽고 나무의 싹이 더 많이 나왔다. 비를 맞은 자연의 힘은 위대하여 받은 만큼 주고 뿌린 만큼 돌려준다. 아직도 많은 비를 안고 있는 듯 구름이 하늘을 덮어 날은 어두워도 기분은 어느 때보다 상쾌하다. 성당 앞을 지나간다. 기러기 한 마리가 성당 앞 잔디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성당을 지키고 있다. 봄인 줄 알고 왔을 텐데 이곳의 날씨가 협조를 안 해준다. 돌아갈 수는 없고 따뜻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여전히 따뜻한 곳을 찾아오는 기러기들이 편히 살다가기를 바라며 걸어간다.


봄은 이렇게 알게 모르게 우리 곁으로 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안 온다고 했다. 성당 가까운 곳에 재수학원이 있는데 대규모 공사를 하는데 많은 나무가 뽑힌 자리가 보인다. 개발을 위해 공사를 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면서도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게 사람들이다. 나무 한그루가 자라는데 수년이 걸리는데 빌딩을 짓기 위해 다 자란 나무를 싹둑싹둑 자른다. 그야말로 하나만 알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사는 것이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끼고 나와 다행이다. 개인 콘도를 판다는 팻말이 보인다. 새로 담을 세우고 깨끗이 단장한 모습이 보기 좋은데 좋은 임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아직은 작년에 맺은 열매와 함께 살아가는 마가목 나무가 쭈글쭈글한 빨간 열매를 매달고 서 있다. 머지않아 예쁜 하얀 꽃을 피고 연두색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마가목 나무 열매는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주홍색으로 변하다가 아주 추운 겨울에는 새빨갛게 익어간다. 길가에 있는 장로교회 옆에 잣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큰길에는 차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주택가로 걸어본다. 구름 속에 숨어있던 햇빛이 고운 자태를 드러내며 살며시 얼굴을 보여준다. 바람이 불고 해가 나오니 비로 흠뻑 젖었던 거리가 바짝 말라서 비가 온 흔적이 없다. 하늘은 파랗게 개고 눈부신 햇살은 온 세상을 찬란하게 비춘다. 이제 겨울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초록의 봄이다. 오늘 하루 동안 두 개의 계절이 찾아왔다. 날씨도 마음도 실로 변화무쌍하다. 그 많던 구름은 어디로 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는 오늘 나는 겨울과 봄을 만났다.


우리들 삶에도 계절이 있다. 외롭고 쓸쓸한 겨울 같은 날도 있고 봄처럼 화창하고 따스한 날도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고 가는 다른 계절을 만나며 그 안에 있는 삶의 의미를 본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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