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일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고맙다. 변함없이 어제와 같은 날들이 오고 가는 것이 좋다. 심심하고 무의미한 듯 재미없게 지나가는 세월이라 다행이다. 할 말이 없고 쓸 글감이 없는 무미건조한 날이라서 새로운 날을 희망할 수 있다. 매일이 좋은 날이면 소중함이 없고 매일이 힘든 날이면 삶이 절망스러울 텐데 어떤 날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을 기다린다. 잔잔한 재미가 없는 삶이라고 불평하지 않고 할 일을 찾으면 된다. 노동은 삶을 피폐하게 하지만 결과를 낳는다. 봄이 왔으니 집안 정리를 해야 한다 는 마음인데 몸은 그냥 편하게 있자고 한다.
유혹은 어디에나 있다. 마음은 봄이 왔으니 밖으로 나가라고 하는데 어질러진 집안을 보면 한시가 급하다. 세월 따라 살림도 늘어나고 추억도 많아져서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집안 곳곳에 쌓여있다. 마음에 근심 걱정이 많으면 만사가 귀찮은 것처럼 물건이 많다 보니 집안이 복잡하다. 별것도 아닌데 버리자니 그렇고 장소만 차지하여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도 마음뿐이고 실천하기 힘들다. 옛날에는 일을 하면서 하루 노는 날을 정해 놓고 정리를 하였는데 지금은 매일 놀면서도 안 한다. 게으름 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그냥 보고 지나치며 차일피일 미루며 산다.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도 다 같은 말을 한다. 바쁘게 일할 때는 몸도 손도 빨라서 후다닥 대청소를 했는데 벼르고 벼르다가 시작해도 끝이 없다. 차라리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시간을 정해주면 간단할 텐데 시간이 많다 생각하고 산다. 벌써 5월이다. 연말연시라고 술렁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하루하루 살다 보니 5월이 되었다. 지나는 시간을 잡을 수 없고 오는 날을 막을 수 없다. 숨 한번 쉴 때마다 뚝딱거리며 시간도 간다. 철없던 어린 시절 기억이 아직도 또렷한데 거울을 보면 모르는 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나이를 먹지 않고 주름살도 안 생기고 어깨도 구부러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낯선 사람이 나라고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고 싶지 않아 산책을 나가 걷는다. 집에 있으면 뭐라도 치우고 정리할 테지만 나가서 봄을 만나고 와야겠다. 봄과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봄은 그곳에 있다.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봄을 만날 수 있지만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르고 새가 노래하는 숲으로 간다. 숲은 어느새 새싹으로 꽉 차서 숲 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계곡 물에서 오리 한쌍이 헤엄을 치며 놀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푸드덕 거리며 날아간다. 잡아먹히기라도 할까 봐 도망가는 오리한테 미안하다. 지난번 길가에서 보았던 늑대를 만날까 봐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데 적으로 착각했나 보다.
아직은 풀이 없어 바짝 마른 낙엽들이 걸을 때마다 서로 부딪혀서 바스락 거린다. 손톱만큼 자란 작은 민들레가 길가에 피어나고 이름 모를 풀들이 하나둘 마른풀들을 헤치고 나온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여기저기 있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앞으로 전진이다. 숲 속의 오솔길은 오르락내리락하고 경사가 심하지만 걷는 재미가 있다. 수도 없이 온 길이라 안 보고도 간다. 아침에 나올 때는 약간 썰렁했는데 걷다 보니 더워져서 땀이 난다. 지퍼를 내리고 걷다가 쟈켓을 벗어 허리에 묶고 걸어간다. 몸이 새처럼 가벼워 날것처럼 빨리 걸어간다.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깜깜 해지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봄비가 온다. 숲이 뽀얗게 봄비로 적셔지고 바람이 분다. 모자를 쓰고 나무 사이로 걸어가다 보니 비가 멈춘다. 지나가는 비였나 보다. 온길로 다시 들어가 계곡을 끼고 걸어간다. 앞에서 계곡이 흐르고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서서 내려다본다. 뒤로는 양지바른 언덕이 있고 앞에는 계곡물이 힘차게 흐른다. 봄에는 푸르른 이파리들이 하늘거리고, 여름에는 녹음이 지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눈이 부시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쌓여있어 천국에 온 것 같은 이곳이다. 거의 매일 다니는 길이다 보니 눈을 감고도 보인다.
이제 조금 있으면 초록의 세상이 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버섯과 산나물이 자라고 들꽃이 핀다. 아주 작은 싹으로 시작하여 잎을 달고 꽃을 피우며 씨앗을 매달고 있으면 겨울이 온다. 돌고도는 계절을 따라 살다 보니 지금의 나를 만난다. 아무런 특별한 일이 없어도 숲에서 만나는 자연과 함께 산다. 파란 하늘을 보고 계곡에서 노는 오리들을 만나며 때가 되면 피어나는 들꽃을 보면 더없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