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생활.
축구 선수로서의 아르헨티나 생활은 그 전의 생활과 사뭇 달랐다. 나는 그 이후로 6개월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기상하고 같은 시간에 운동장에 도착해 비슷한 스케줄로 살았다. 말 그대로 '축구 선수'로서 6개월을 살았다. 다시없을 순간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힘든 시간도 기뻤던 시간도 모두 황홀했다.
그 황홀했던 시간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다.
처음 나는 미드필더를 희망했고 미드필더로 뛰었다. 2주 정도 뛰었을 무렵, 총감독이 내게 찾아왔다. 그가 말하길, 이 자리에서 뛰려면 더 많이 뛰어야 하고 더 많이 부딪혀 줘야 한다고 했다. (사실 나도 4-4-2의 미드피필더 자리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에게 윙으로의 포지션 변경을 제안했고 윙으로 뛰게 되었다. 그 후 다른 선수보다 뾰족한 공격력이 없었던 나는 결국 윙백으로 내려앉았다.
부에노까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삐친차역에 위치한 한인 숙소다. 내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고 얼마 뒤 생긴 한인 게스트 하우스였고, 덕분에 나는 저렴한 가격에 독방을 쓸 수 있었다. 위치 또한 센뜨로(중심가), 레띠로(기차역)와 가까워 운동에 집중하기엔 최적의 숙소였다. 사장님도 너무 친절하고 좋으신 분이라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다. 곧 다시 찾아뵙길 희망한다.
내가 있던 'Jugadores libre'라는 독립구단은 이름 그대로 자유 선수? 들이 모인 곳이다. 팀에서 잠깐 나와 있거나, 팀을 옮기기 위해 공백기가 생긴 선수들이 폼을 유지하기 위해 찾는 곳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성인팀 또는 상위팀으로 가지 못해 팀을 찾고 있는 선수들이 모여있는 팀이다. '진짜 팀'을 위한 팀이다. 그래서 조금 잘한다 싶은 선수는 1~2주 만에 팀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구단의 트라이얼 있을 때 함께 참가하기도 한다. 나는 결국 다른 팀을 찾지는 못했지만, 내 축구의 한계를 여기서 느꼈다.
인구 4천만의 아르헨티나는 끊임없이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한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혹자는 말한다. '못 사는 나라가 그렇지 뭐. 공놀이 밖에 할 게 없잖아' '인종이 다르잖아 그냥 축구를 잘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에서 끊임없이 세계적인 축구 선수가 나오는 이유는 '축구에 대한 진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축구 감독이었던 아버지와 축구 선수였던 사촌 덕에 엘리트 축구씬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다. 한국 축구 지도자들 중 축구에 진심인 사람을 몇 못 봤다. 대부분의 한국 지도자들에게 목격한 모습은 축구를 자신의 돈벌이이자 유일하게 배운 '기술'로 대하는 태도였다. 나는 그런 지도자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지도자는 진정으로 축구를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왜 서른이 넘어서 '축구 선수'라는 꿈을 잊지 못하고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까지 갔을까? 나는 이 경기를 마치고 '축구 선수'라는 꿈을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 축구의 한계를 손으로 직접 만졌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로 떠난 나의 여정은 결국 '축구 선수'라는 꿈을 이루는 과정임과 동시에 깨끗하게 포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꿈을 향해 도전해 보지 못한 미련을 미련으로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정말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했고 그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 안고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나는 그렇게 더 이상 축구선수에 미련을 가진 사람이 아닌 진짜 축구팬으로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훈련 영상으로 '서른 축구하기로 결심하다'의 글을 마치고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