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축구 Dec 31. 2022

3-6. 서른, 축구하기로 결심하다.
(마지막편)

축구선수 생활.

축구 선수로서의 아르헨티나 생활은 그 전의 생활과 사뭇 달랐다. 나는 그 이후로 6개월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기상하고 같은 시간에 운동장에 도착해 비슷한 스케줄로 살았다. 말 그대로 '축구 선수'로서 6개월을 살았다. 다시없을 순간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힘든 시간도 기뻤던 시간도 모두 황홀했다. 
그 황홀했던 시간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다. 
전술 감독이 써놓은 포지션을 몰래 찍어봤다. 미드필더에 내 이름이 보인다 LEE
처음 나는 미드필더를 희망했고 미드필더로 뛰었다. 2주 정도 뛰었을 무렵, 총감독이 내게 찾아왔다. 그가 말하길, 이 자리에서 뛰려면 더 많이 뛰어야 하고 더 많이 부딪혀 줘야 한다고 했다. (사실 나도 4-4-2의 미드피필더 자리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에게 윙으로의 포지션 변경을 제안했고 윙으로 뛰게 되었다. 그 후 다른 선수보다 뾰족한 공격력이 없었던  나는 결국 윙백으로 내려앉았다.
운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기차역. 이 계단을 내려갈 때는 항상 온몸이 부서질 듯한 행복한 고통이 있었다.
운동 첫 타임 피지컬 세션은 요일마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운영됐다. 8월이라 아르헨티나는 겨울이었고 날이 좀 쌀쌀했다.
피지컬 세션
운동 두 번째 타임, 두 번째 타임에서는 전술 훈련 및 게임을 뛴다.
맨 왼쪽 저 친구가 왼발을 참 잘 쓰는 우리 팀 에이스였다.
숙소에서 아침을 챙겨 먹고 구단으로 나서기 전, 이때 묵었던 '부에노 까사'는 내게 최고의 숙소였다.
부에노까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삐친차역에 위치한 한인 숙소다. 내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고 얼마 뒤 생긴 한인 게스트 하우스였고, 덕분에 나는 저렴한 가격에 독방을 쓸 수 있었다. 위치 또한 센뜨로(중심가), 레띠로(기차역)와 가까워 운동에 집중하기엔 최적의 숙소였다. 사장님도 너무 친절하고 좋으신 분이라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다. 곧 다시 찾아뵙길 희망한다.
(좌)19살이었던 왼발잡이 공격수로 기억한다. 꽤나 잘해서 그런지 우리팀에선 금방 안보이기(?) 시작했다. / 내 나이를 듣고 많이 놀랐던 우리팀 센터백


 내가 있던 'Jugadores libre'라는 독립구단은 이름 그대로 자유 선수? 들이 모인 곳이다. 팀에서 잠깐 나와 있거나, 팀을 옮기기 위해 공백기가 생긴 선수들이 폼을 유지하기 위해 찾는 곳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성인팀 또는 상위팀으로 가지 못해 팀을 찾고 있는 선수들이 모여있는 팀이다. '진짜 팀'을 위한 팀이다. 그래서 조금 잘한다 싶은 선수는 1~2주 만에 팀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구단의 트라이얼 있을 때 함께 참가하기도 한다. 나는 결국 다른 팀을 찾지는 못했지만, 내 축구의 한계를 여기서 느꼈다.
구단 운동장으로 가기위해 매일 새벽 기차역을 찾았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늘은 항상 맑고 푸르다.


다들 나보다 10살은 어린 선수들이다. 팀조끼에 낫소가 인상적이다. / 운동을 마치고 샤워하기 전
나와 비슷한 뜻과 생각을 가지고 아르헨티나로 온 일본인 친구 히로. 참 착하고 좋은 친구였다. 이 친구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피지컬 트레이닝 타임을 앞둔 팀 동료들. 시설은 한국과 비교도 안되게 열악하지만 다들 진심으로 훈련한다.
운동을 다 마치고 나면 이렇게 개인적으로 마무리운동을 한다.
조금 일찍 구단에 도착했는데, 피지컬 코치가 훈련 세션을 세팅하러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무리 작은 구단이라도 코치는 코치의 일을 다 한다. 한국에선 잘 보지 못한 모습이다.
인구 4천만의 아르헨티나는 끊임없이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한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혹자는 말한다. '못 사는 나라가 그렇지 뭐. 공놀이 밖에 할 게 없잖아' '인종이 다르잖아 그냥 축구를 잘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에서 끊임없이 세계적인 축구 선수가 나오는 이유는 '축구에 대한 진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축구 감독이었던 아버지와 축구 선수였던 사촌 덕에 엘리트 축구씬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다. 한국 축구 지도자들 중 축구에 진심인 사람을 몇 못 봤다. 대부분의 한국 지도자들에게 목격한 모습은 축구를 자신의 돈벌이이자 유일하게 배운 '기술'로 대하는 태도였다. 나는 그런 지도자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지도자는 진정으로 축구를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첫 번째 세션을 하러 가는 팀 동료들
이 둘은 처음 만났을 때 주먹다짐할 뻔했다. 둘 다 괜찮은 9번(스트라이커)이다.
얘랑은 나도 한번 싸웠었다. 패스 안 준다고 엄청 뭐라 해서 안 되는 스페인어로 샤워실에서 언성을 높였었다.
매 주 화요일은 체력운동 세션이 있었다. 이 날은 진짜 반 죽음 상태로 운동이 끝났다.
총감독, 피지컬 코치, 전술감독
다른 구단과 연습경기가 잡힌 날, 너무나 뛰고 싶었다.
결국 후반에 교체출전했다. 이 날의 기록을 유튜브채널 'che Corea'가 도와주었다.
경기를 마치고 팀원들과 함께.
운동 마지막날 팀 에이스들과 함께. 여기에 있는 친구들은 진짜 다 잘했다. 몸만 봐도 뭐.
나는 왜 서른이 넘어서 '축구 선수'라는 꿈을 잊지 못하고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까지 갔을까? 나는 이 경기를 마치고 '축구 선수'라는 꿈을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 축구의 한계를 손으로 직접 만졌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로 떠난 나의 여정은 결국 '축구 선수'라는 꿈을 이루는 과정임과 동시에 깨끗하게 포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꿈을 향해 도전해 보지 못한 미련을 미련으로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정말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했고 그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 안고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나는 그렇게 더 이상 축구선수에 미련을 가진 사람이 아닌 진짜 축구팬으로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https://youtu.be/HG0-uZqLoXo


마지막 훈련 영상으로 '서른 축구하기로 결심하다'의 글을 마치고자 한다.  끝.

이전 17화 3-5. 서른, 축구하기로 결심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