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붉어졌으므로
날 수 있다고 믿었을까
내장이 비어져 나왔을 게다
잿빛 바닥을 뒹굴며
피붉다
타고난 우울을 내장한 나는 무얼 보든 슬픔을 기본값으로 깔고 사유한다. 붉은 낙엽을 보고 영원회귀로 귀소 하는 재생의 열정을 노래할 수도 있는 일인데, 도무지 그러지 못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수구초심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울이 깊어지면 병이 되기도 하겠지만, 예술적 동력이 되기도 한다. 무기력이 주요 증상인 우울증이 어떤 행위의 추동력이 된다는 건 아이러니다.
쓴 지 오래된 이 디카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가 쓴 디카시다.
인간이라는 종은 대부분 무리 짓기를 본능적으로 좋아해서 어떤 식이든 집단에 속하지 못하면 불안해하고 소외감으로 몸부림친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여 집단의 구속 속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것이다.
각종 미디어에서도 집단에 속하길 꺼려하는 인간을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매도하곤 하니, 홀로 오롯이 존재하려는 인간에게 대중은 의심의 눈초리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만 되면 술집에 몰려다니며 자신의 남다른 인맥을 연신 자랑한다.
인맥이라는 단어처럼 불경한 말이 또 있을까? 인간관계를 사회적 성공과 부의 척도로 여기는 단어가 아닌가. 그들에게 인간관계는 화폐다.
인맥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내세우는 목표를 성찰하지 못한다. 돈과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그런 능력을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은 진정한 가치가 내재되지 않은 비정상적 집단 목표를 향해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집단에 휩쓸려 무모해질 정도로 용감해진다. 그리고 개별적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도래하면 집단에 의지하던 개개인은 어이없을 정도로 비루해진다.
생의 결말일 것이 확실한 죽음은 철저히 개별적이다. 누구도 누구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나의 죽음은 너의 죽음과 구별된다. 그것이 집단 자살이거나 홀로코스트에 의한 것이라도 내 죽음은 내 몫이고 너의 죽음은 너의 몫이다.
내 죽음을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단 한 번의 삶을 유행 따라, 다른 사람 눈치 보며, 집단에 휩쓸려 산다는 건 속절없다.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고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만큼 순도 높은 타인과의 소통을 나는 알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그러한 사람의 존재 방식은 집단적이지 않다. 사람은 붕어빵이 아니다. 저마다의 개성을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음껏 표출하는 일은 한 번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개성을 가두지 않고 자연스레 발화하며 필수적인 의제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필요할 때는 충분히 연대할 수 있다.
이 디카시는 내 사족처럼 구구절절하지 않다.
그러면서 내 구구절절을 모두 포함한다. 짧지만 생의 비의를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몇 문장을 쓰고 있노라면 내가 앓는 우울증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이런 날의 나는 마음껏 우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