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뛰는 소리 말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거친 숲을 헤치며
몸 부서지도록 나 그대에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디카시를 썼을 때는 디카시라는 문학 장르 명칭이 인구에 막 회자되기 시작한 때였고, 몇몇 디카시 공모전이 새로 생겨 개최되던 시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에도 디카시는 이러해야 한다 저러해야 한다 설명하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렇게 쓰면 사진시고 또는 포토시고 누구는 저렇게 쓰면 포토포엠이고 이러저러하게 써야 디카시다, 라고 이론을 펼치곤 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게 아니라, 그러한 때에 황순원 디카시 공모전 요강을 보았다. 관심이 생겨서 처음 디카시라는 걸 위와 같이 써서 응모했다.
입선했다는 문자를 받고 많이 좋아했다.
정말 좋아했던가?
왜 입선밖에 안 주지?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여튼 건방지기는...
나는 문학을 아주 많이 좋아하지만 문학은 이러해야 한다, 라고 단언하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얼마든지 길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럴 만한 지면은 아니고,
마찬가지로 디카시에 대한 정의나 규정, 이론적 틀 같은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그저 예술을 좋아하고 느낌을 신봉한다. 예술이란 느낌의 세계가 아닐까. 문학예술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희미한 경계로 구역 지어지는 느낌의 공동체(신형철)가 분명 존재하니까. 나는 그 공동체의 외진 곳을 어슬렁거리는 주변인으로서 문학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디카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사진을 찍고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면 그것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해 둔다. 내가 디카시를 쓰는 방식의 전부다.
내 휴대폰에는 디카시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을 때부터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이 있었고 그중 많은 사진에는 내가 지은 문장이 같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중 극소수의 문장은 퇴고되어 시가 되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사진과 함께 디카시가 되기도 했다.
위 디카시 문장은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 '몽니'의 노래 "나 지금 뛰어가고 있어"를 듣다가 발작적으로 쓴 문장이었다.
집 앞 공원에서 찍은 달팽이 사진을 보며 듣는 몽니의 음악은 심장 박동을 증폭했다. 노래 가사는 내 몸에서 화학반응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재채기하듯 튀어나왔고, 그 문장을 달팽이 사진 밑에 걸어두니 그럴듯했다.
당시의 나는 어딘지 모를 곳에 닿고 싶었고, 정말 그곳으로 뛰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저 달팽이는 도대체 어딜 향해 저리 바쁘게 뛰어가는 것인가?
오늘 아침에도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땀을 닦으며 달리기를 끝냈을 때는 제자리였다.
쳇바퀴 안의 다람쥐 같던 내 다급함이 안쓰러워 또 문장을 끄적이고 책을 뒤적인다. 새로운 문장을 이전의 문장 위에 덧바른다. 팬 케이크처럼 내 인식은 두터워진다. 나는 느낌의 공동체 안에서 즐겁게 방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