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나보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얀색 회색 책상을 사주셨더랬다. 아마 3학년 정도였을 거다. 나는 집이 아닌 상업용 건물에 3층에 살았다. 1층 빵집, 2층 전당포 그리고 3층 탁구장 그리고 그 3층 탁구장 옆에 부엌과 방과 허접한 마루가 있던 곳이다. 거기 구석에 어머니는 나만의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그게 나만의 자리라는 증거는 바로 어머니가 사주신 회색 책상이었다. 어린 나이에 거친 나뭇결로 만들어진 학교 책상만 만지다가 윤기가 도는 회색 책상을 보니 뭔가 근사해 보였다. 책상 위의 코팅면이 부드러웠고 수없이 줄지어 인쇄된 회색점들이 멋져 보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책상이 점점 싫어졌다. 슬슬 책상 서랍이 한쪽이 기울어 열리더니만, 나중엔 잘 열리지도 않았다. 특히 서랍을 열 때 서랍의 안쪽 부속이 어딘가 부딪혀 나는 철커덩 소리가 무섭게 느껴졌다. 회색 위 코팅은 금방 벗겨져 버리고 낡아버렸다. 이 책상은 꼭 나에게 앉을 때마다 냉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정말 싫었던 건 책상에 앉아서 책 읽다가 내 하얀 무릎이 책상 옆면이랑 부딪힐 때 쇠가 나에게 드리우는 그 차가운 기운이었다. 땀 흘리는 여름이라도 반갑지 않을 듯한 기분 나쁜 필요 이상의 냉기. 그 책상을 포마이커 책상이라고 불릐우는지는 나중에 교과서에 실린 글 이어령 선생님의 <삶의 광택> 때문에 알게 되었다.'나는 후회한다. 너에게 포마이커 책상을 사 준 것을 지금 후회하고 있다. 그냥 나무 책상을 사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라는 그의 글을 어렸을 때도 알았다면 전적으로 동의했을 거다.
그 이후로 거의 26년여 만에 나 스스로 최초로 내 돈으로 산 책상은 내 인생 첫 책상과 많이 다른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날 실망시켰던 그 책상과 차별을 최대한 차별을 두고 싶었던 내 잠재의식이 작동한 것 같다.
우선 가족과 함께 쓰는 공유 책상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 4명이 써도 되게끔 가로 5m가 넘는 긴 책상을 찾았다. 내 딸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옆에 아빠인 내가 슬그머니 가서 앉아서 읽는 걸 도울 수 있는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런 의미로 난 사실 독서실보단 규모가 큰 공립도서관에 가서 많이 공부했다. 사실 칸막이를 빼면 넓고 긴 책상에서 공부하는 샘이다. 난 맘속에서 칸막이를 없애고 그들의 분위기를 나에게 동화시키고자 노력했다. 나 스스로 혼자 공부하는 것보단 분위기에 묻혀서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나뭇결이 살아있는 책상을 원했다. 열전달률이 적은 나무를 만지며 자연스럽게 파여있는 곳도 만지며, 가족 누군가의 온기나 결이 쉽게 스며들고 그걸 전달받고자 했다. 그리고 그 상에서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과일을 갖다 놓고 함께 먹으며 이야기 꽃도 피고, 손님이 오면 차도 한잔 마실수 있도록 다 목적으로 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의자의 개수를 놓지 않고 좌식으로 앉을 수 있는 책상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데스 데코라는 곳에서 20만 원 안 되는 가격으로 위 조건에 맞는 책상을 사서 거실에 두었다. 자연스럽게 책장에서 책을 꺼내서 책상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어언 책상을 사서 쓴 지 3년은 된 것 같다. 아이들이 커가니 책상엔 노트북이 등장하고 핸드폰에 과자 부스러기에 아들놈 스피너에 별의별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다. 아들이 소리 내서 책을 읽으면 영어 듣기 평가를 하고 있는 딸이 "조용히 해!"라고 소리를 지른다. 물건들이 차고 넘쳐 더 이상 자리가 없으면 따로 조그만 상을 옆에 두고 공부하기도 한다. 내 책을 둘 때 옆 물건을 스윽 옆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왁자지껄, 탈도 많고 다툼도 있지만, 그래도 서로의 좋은 리듬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에 열심히다. 다른 것을 하지만 같이 하는 이 공간이 나중에 없어질까 봐, 그리고 이 책상의 주인이 4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까 봐 걱정이다. 여기서 처음 열었던 내 자식들의 10장짜리 책이 나중에 400쪽짜리 전문서적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크고 작은 마찰로 닳고 달아 책상 표면의 자연스러운 얼룩과 윤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런 오래된 책상을 문지르며 나 또한 웃으며 같이 성장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