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귀영화) 1.2 - 자기 객관화
3) 자기 객관화의 필요성
무사히(?) 시나리오 업로드를 마친 후, 며칠이 지나고 게시판에 첫 피드백이 올라왔다. 걱정반 기대반으로 두근두근 하는 마음을 붙잡고 클릭을 했다. 그리고 피드백을 읽는 내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첫 시작 문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왜냐면 아로새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피드백들을 옮겨 적어놨던 기록이 있음)
"현 시나리오는 일기장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없는 일기장입니다."
아...
첫 문장 밖에 안 읽었는데도 갑자기 집 나갔던 정신이 돌아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정신아 왜 집을 나갔던 거야!!!!!? 그 후 올라올 피드백들은 읽지 않아도 다 알 것만 같았다. 이 기분은 정말로... 심봉사가 갑자기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심봉사가 갑자기 눈을 떠? 장님이라는 거 다 개구라였던 거 아냐? 아니, 그렇게 쉽게 뜰 거였으면 애초에 왜 눈을 감고 있었던 거야? 하고 애먼 심봉사에게 화를 내고 싶을 정도로…
사람이란 참 희한한 존재다.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자기 객관화가 되는 건지... 그렇게나 순식간에, 나는 이 이야기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 글에는 '기승전결'이 없고, '갈등'이 없고, '드라마'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이걸 왜... 도대체 왜... 쓰고 나서, 아니 업로드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인가! 하고 아무리 대나무숲에 외쳐봤자 그 목소리는 대나무 사이를 메아리치다가 내 얼굴을 도로 때리는 꼴이었다.
그 후로 며칠에 걸쳐, 수업 전까지 수십 개의 피드백이 올라오면서, 그리고 그 피드백들을 하나하나 다 읽으면서, 나의 두근거리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다 못해 더 찢어질 곳이 없어 공중분해가 되어버렸다. 수업 날이 가까워질수록 밤마다 이불킥을 했다. 이번 주 수업을 어떤 낯짝으로 가야 하나, 선생님께는 어떤 더 심한 쓴소리를 들을까 싶어 두려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찔끔 울기도 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나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제가 어떻게 써야 할 줄 모르겠어서 그냥 막 썼는데 이 글이 이제 보니 시나리오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고, 기승전결도 없고, 갈등도, 드라마도 없고, 어떠한 것도 없는 정말 별로인 글이니 제발 내일 시나리오 평을 하는 시간을 갖지 말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걸 읽으셔야 하는 동기들의 시간과 피드백해줘야 하는 노력이 너무 아깝고 죄송스럽습니다."
십 분마다 이메일 새로고침을 누르며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 클릭 클릭 클릭. 드디어! 답장이 왔다! 시나리오 올릴 때보다 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눌러서 선생님의 답장을 읽는데...
"시꺼 인마! 걍 해!"

잘 있거라 내 인생....
즐거웠다 내 인생.....(정말?)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며... 그러나 세상은 망하지 않으며, 수업 시간이 다가왔다. 수업을 갔을 때부터, 내 차례가 끝나기까지, 그리고 그날 수업이 끝나기까지... 무슨 정신으로 그 시간을 견뎠는지 모르겠다. 수업에 들어갈 때 저번에 이야기 나누던 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이 언니의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얘는 도대체 뭐야? 자기 현재 위치도 모르는 개허접나부랭이네?' 하는 눈빛이었달까... (지극히 주관적이고 열등감에 쩌는 저 혼자만의 망상적 해석입니다)
드디어 시나리오 피드백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읽느라 수고했다. 이 글은..."
두근두근. 벌렁벌렁. 이제 매 다 맞았으니까 더 이상 매질하지 마세요... 제발....
"바로 시나리오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쓰레기다 쓰레기! 네가 이 글을 제출함으로써 얻은 것은, 네가 이걸 시나리오로 착각하고 제작사에 돌렸다면 블랙리스트에 니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올랐을 텐데 그럴 가능성이 사라졌으니 그것이 네가 얻은 아주 큰 교훈이다. 이건 절대로, 누구에게도 다시는 보여주지 말고, 얼른 갈기갈기 찢어버려!"
하하하. 갈기갈기 찢기 전에 이미 제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졌는뎁쇼… 가엾은 내 영혼은 이미 강의실을 이탈해 신촌 어딘가를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꿋꿋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시면서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 (갈등, 기승전결 등등)을 설명하셨다. 그렇죠. 원래 최악의 글에 배울 것들이 가득한 법이니까. 암요.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이셨다.
"이건 시나리오라고 할 수조차 없으니까 넌 벌금 10만 원 내."
하......
십만 원?
그 후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교실 앞에 나가서 왜 이런 글을 썼고, 쓰면서 무엇을 느꼈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등등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다들 느꼈을 거다. 교실에 있는 나는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연단에 섰다.
"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다른 이야기를 쓰려했는데 역량이 안 돼서 구성을 잘 못하겠었고 그런데 시간이 가다 보니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뭐라고 나불거렸는지 모르겠지만 사과와 반성의 멘트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그런데 선생님, 저 10만 원은 못 내요."
"안돼. 내야 돼."
"못 냅니다. 이게 비록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저는 그래도 기간 안에 글을 썼으니 안 낼 겁니다."
하.
지금 생각해도 나 스스로가 참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저런 말을 했지? 아무리 부끄러워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아도, 그보다 더 한 것이 궁함이다. 나에게 십만 원은 정말로 거금이었으니까. 그래도 나 나름의 노력은 했는데 십만 원을 내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내면 안 된다고, 절대 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어떻게 됐느냐? 선생님이 깎아주셨다. 오만 원으로 거래가 성사됐다.
그 후 늘 하던 대로 수업이 시작됐다. 나는 자리에 돌아와 잠깐 앉아 있다가 슬쩍 강의실 뒷문으로 나왔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여전히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화장실 가는 길에 있던 비상구 계단에서 찔끔찔끔 울었다. 당시 강의실은 높은 건물 거의 꼭대기층에 있었는데, 비상구 쪽문으로 번쩍거리는 신촌의 네온사인들이 늘어선 길거리가 보였다.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뿌얘지는 걸 보면서 육신을 떠나간 내 영혼에게 말했다.
그냥 계속 떠나 있어라.
너무 빨리 안 돌아와도 돼.
좀 마음 추스르고 나면 다시 돌아와.
아예 안 오겠다고?
그럼 난 어째. 뿌엥.
빨개진 눈을, 알러지인 척 괜히 비비며 수업 중인 강의실로 돌아갔다. 다행히 동기들은 쉬는 시간에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왕따 당하는 게 아니라 배려심 덕분이라 믿어야지). 그렇게 호되게, 글을 쓸 때는 자기 객관화가 돼야 한다는 것을 배웠던 시간이었다.
...
...
...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이 자기 객관화라는 것이 한 번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생각해 보면 영화를 하려면, 글을 쓰려면, 거의 뭐 이중인격자로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자기 객관화를 어느 정도, 필요에 따라, 어떤 타이밍에는 해야 하지만, 어떤 때는 또 미친 사람처럼, 온갖 망상과 상상에 사로잡혀 글을 써야 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경험들을 통해 글을 쓸 때는 상당한 자기 객관화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한 발짝(아니면 한 뒤꿈치) 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나자 가을이 왔다.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번 해에는 아카데미와 한예종을 둘 다 지원해 봐야겠다 결심했다. 다 떨어질 가능성이 크니까 어디라도 되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둘 다 지원해 보자는 계획이었다. 아카데미 지원을 먼저 했는데 아카데미에 1차 지원을 하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가장 큰 산은 10장짜리 자기소개서 쓰기였다.
10장의 자기소개서라. 누군가에겐 꽤나 많은 분량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주 즐겁게 이 10장을 어떤 방식으로 채울까 고민했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려고만 하면 머리가 갑자기 아프고 해파리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고, 자신이 없는데 그 외의 글들은 어떤 종류를 쓰든 간에 마음이 가볍고 즐겁다. 어떻게 요리를 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 오랜 기간 나를 봐 온 교수님도 그런 말을 하셨던 적이 있다. “너는 시나리오 뺀 나머지 글은 정말 잘 쓴다.”라고. 이것이 칭찬이여 저주여? 하는 썩은 표정을 짓고 있자 교수님이 덧붙이셨었다. “그게 어디여~ 히힛!” 당시엔 교수님을 한 대 때려….(아이쿠 여기까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무슨 종류가 됐든 간에 어쨌든)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이 업계에서 일을 하는데 어마어마한 장점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아카데미에 입학용 10장짜리 자기소개서를 쓴 후로도, 지금까지 거의 수십 개의 자기소개서뿐만 아니라 온갖 기획안과 줄거리, 피칭 포인트 등등 수많은 종류의 글들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지원 사업에 신청하든, 어떤 프로그램에 신청하든 일단 글로서 보여주는 것이 제일 시작인데 그거라도 재미있어하며 썼기 때문에 조금은 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즐겁게 자기소개서를 쓰고 1차에 합격했다. 2차는 작문 시험이었는데 세 종류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키워드가 주어지면 그것들을 이용해서 짧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하나 있었고, 당시 장편과정이 만든 (아직 개봉 안 한) 영화를 보고 그 영화 내용(또는 캐릭터)을 이용해, 또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나 같은 비포트폴리오 전형들만 보는 시험이었는데 밖에 나가 사진을 5장 찍어온 후, 그 5장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적어 내는 시험이었다. 이런 종류의 시험들이 있을 거라는 걸 여러 정보들을 종합한 끝에 대충 알고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작문은 내가 뭔가 벼락치기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이야기를 잘 쓸 수 있는가, 글빨이 있는가를 보는 종류의 시험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을 다잡는 것뿐이었다. 일단 제일 처음으로 마음을 다잡았던 건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었다. 전년도에 지원했을 때, 2차 시험을 보면서 교수님이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를 써야겠죠~”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승전결이 없는 이야기를 썼던 경험, 또 S 스쿨에서 눈물을 쏙 뺀 경험 덕분에 이번에 만큼은 무조건! 꼭!!!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를 쓰겠다! 하는 다짐을 굳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글빨을 키우는 건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5컷 이야기를 쓰기 위해 미리 사전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차 시험이 있던 전날, 홍대입구역에 가서 아카데미 건물 근처 골목들을 열심히 걸어 다녔다. 약간… 로케이션 헌팅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냥 학교 주변 골목들이라도 알아 놓자는 심정이었다. 그래야 제한적인 시간 안에 어떤 이야기를 구상해야 할 때, 시간 낭비 없이 마음에 들었던 장소들이라도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2차 시험을 준비하고, 꽤 만족스럽게 시험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시험을 보고 나서는 덜덜 떨었다. 전 해에도 2차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면접까지 만이라도 가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아카데미 면접은 압박 면접으로 유명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왔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도대체 우리나라에 왜 압박 면접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거 해서 뭘 알 수 있다고?’ 하면서 혼자 화를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런 면접을 너무나 해보고 싶었다. 특히 아카데미 면접은 1시간 동안이나 한다고 해서, 그 면접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경험이고 배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제발 면접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렇게 2차 결과를 확인했는데 이럴 수가. 2차에도 합격을 한 것이다! 호뤠이! 정말로 면접을 할 수 있게 됐다!
면접 한 시간 전부터 학교로 가서 근처 카페에서 마음을 다잡고 기다렸다. 드디어 면접 시간이 돼서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수험표를 가슴에 붙이시오>하고 적혀 있었다. 이 종이 쪼가리를 가슴에 붙이라고? 옷핀도 없는데? 하면서 대기실을 기웃거렸다. 이런 것도 혹시 시험의 일종인가 싶기도 하고 밉보이면 안 되지, 하는 생각에 가방을 뒤지다가 왜 때문에 가방을 굴러다니고 있던 바늘을 발견했다. 그래서 수험표를 옷에 붙였는데 자꾸 떨어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면접장까지 걸어가면 또 떨어질 테니 안에 들어가서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자 면접 장소인 소극장으로 갔다.
들어갔는데 극장이다 보니 내가 앉는 의자는 극장 맨 아래 스크린 앞에 있고, 심사위원(교수님)들이 계단식 극장 좌석에 뿔뿔이 흩어져 앉아 계셨다. 오우~ 구조 자체가 상당히 위압감이 있는데? 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수험표를 가슴에 붙이기 위해 꾸물럭 댔다. 그러자 원장님의 호통이 날아왔다.
“뭐 하는 거야? 그런 거 하고 있지 말고 냅둬. 그걸 미리 붙이고 왔어야지 쯔.”
헐. 나 지금 혼나는 건가? 그렇게 혼나면서 면접이 시작됐다.
***4부로 쓴다고 했었는데 5부로 바꿨습니다.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