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성실 Oct 29. 2020

돌봄은 누구의 몫인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밥알을 훔쳤다

육아를 하면서 나를 가장 뜨끔하게 꾸짖어댄 선생은 다름 아닌, 밥알이었다. 

낮잡아 말해 '밥풀때기'


아이와 눈을 맞추고 결을 맞춰가는 모든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럼에도 보람찼다. 아이는 그저 내가 자신의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기다리고 또 용납해주었으니까. 그 격려에 힘입어 나 역시 한뼘씩 자라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밥풀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매일같이 나를 꾸짖었고 나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밥알을 훔쳤다.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밥먹이기 전쟁의 역사는 생후 백일 즈음부터 시작되는데 이유식을 만드는 일이며, 먹이는 일이며, 후처리며 그 노동 강도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보통은 먹는 것보다 더 많은 밥알들을 흘려제끼기 때문에 양 손과 얼굴,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족히 반경 몇 자 정도에 걸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곤 한다. 


결국 누군가는 삼시 세끼 성실하게 어린이의 밥알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변에 떨어진 밥알에서부터 온갖데 붙어버린 밥풀때기들까지. 정도가 심할 땐 입고 있는 옷을 탈탈 털고 환복을 시켜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과정이 생략되면, 의도치 않게 헨젤과 그레텔이 되어버리고 만다. 여기 저기 이동한 흔적을 따라 산발적으로 밥알들이 흩어지면 더 많은 수고를 해야하기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런 상황은 막는게 상책이다.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똥기저귀를 가는 일보다 밥풀을 닦는게 더 싫었다. 도리어 똥은 소중했다. 아이의 건강 상태를 확인시켜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였기 때문이다. 어느날엔간 숨이 넘어갈듯 울어대는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갔는데, 알고보니 복통의 주범이 '장내 가스'였더랬다. 아이는 어렵사리 관장을 마친 후에야 편안히 잠에 들었다. 그만큼 똥이 중요하다. 


그런데 밥풀은 달랐다. 


아이가 흘려놓은 밥풀은 '오늘의 내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상징이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졌다. 

나는. 밥풀을. 닦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부끄러운 고백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고백컨대 내 몸에 새겨진 일종의 계급의식이 쉬이 바뀌지는 않았다. 밥은 또 왜 하루에 세번씩이나 먹어야 하는건지. 밥풀이 몰고 오는 천박한 질문들과의 싸움은 지난했다. 나는 차별주의자로 살아온 지난 생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밥알을 훔쳐댔다. 일종의 속죄의식이었을까. 그 씨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차별주의자입니까"라고 물어온다면 아마도 당신은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말은 쉽고 차별은 깊다. 


당신이 어떠한 소속도 사회적 지위도 갖지 못한 채 심지어는 그에 해당하는 경제적 보수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매일 같이 누군가의 밥알을 닦아줘야 한다면, 당신의 답은 달라질 확률이 높다. 


그간 당신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해왔든지와 무관하게,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 스스로를 '밥풀을 닦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이미 당신은 차별주의자다. 


그 차별의 화살이 겨눠온 가장 확실한 상대는 다름 아닌 당신의 어머니일 것이다. 

아이는 내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밥풀을 닦을 만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나는 이 밥풀 선생이 우리의 돌봄 문제를 해결해 갈 중요한 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가족 돌봄의 오랜 역사를 설명하거나, 돌봄의 사회화에 관해 역설하거나, 정책의 방향을 제안하는 말과 글들은 찾아보면 넘쳐난다. 나 역시 정치하는엄마들과 함께 노동, 보육, 페미니즘, 교육, 공동체 등에 관한 우리의 문제의식과 정책 방향을 책 '정치하는엄마가이긴다(아토포스)'에 담아 제안한 바 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60790212


그러나 지난 몇년간 우리 사회의 돌봄시스템을 고민하며 내가 부딪힌 가장 견고한 벽은 우리 안에 켜켜히 내재된 '돌봄에 대한 편견'이었다. 


은연 중에 더러는 대놓고 돌봄을 천시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야말로 '돌봄 논쟁'에 있어 가장 뜨거운 감자라고 생각한다. 


'밥알'을 닦는 행위는 어찌보면 돌봄노동의 상징이다. 


비단 아이 돌봄만의 문제가 아니다. 갑자기 사고를 당했거나 장애를 갖고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 나이가 들어 거동이 쉽지 않아진 경우, 여튼지간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밥알을 닦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결국, '돌봄이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가'란 주제는 결국 누가 그 '누군가'가 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가족 돌봄, 공동체 돌봄, 사회 복지 법인의 돌봄, 지역 사회 돌봄, 지자체 돌봄, 국가의 돌봄 등. 결국 우리가 그 소중한 '누군가'에게 어떤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가 우리 사회의 돌봄 모델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돌봄을 할 만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당신은 돌봄을 할 만한 사람인가? 아니면 돌봄을 받을만한 사람인가?


나를 포함해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은, 누군가의 성실한 돌봄 끝에 오늘 하루를 맞이한 사람이다. 그리고 결국엔 누군가의 성실한 도움에 의지해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다. 예외는 없다. 나도 그러했고, 당신도 그러하다. 


우리 모두 최소한 생애 어느 기간에 걸쳐 서로에게 기대며 돌봄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다. 우리 모두 돌봄을 받아왔고 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돌봄을 할 만한 사람들'인거다. 열외는 없다. 


그렇다면 돌봄은 누구의 몫인가. 

돌봄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스스로의 마음과 몸을 돌볼 수 있고,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고, 국가와 지역사회가 구성원을 돌보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한다. 여성, 그 중에서도 엄마에게 전가되어 온 간호, 돌봄, 가사 노동의 책임을 어떻게 사회적 시스템으로 만들것인가는 단연 정치의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치'하는'엄마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돌볼 권리'를 향해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것은 구조적 차별만이 아니다. 


우리 안에 무섭도록 깊게 뿌리 내린 편견과 우월의식, 적어도 나는 '누군가의 밥풀을 닦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중성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치열하게 극복하고 투쟁해야 할 적폐다. 


세월은 전광석화처럼 덮쳐올테고 우리는 결국 스스로의 몸조차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어느날에 다다를것이다. 그 날에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게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비참히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부던히 우리 자신을 '밥풀을 닦을 만한 사람'으로 인식해내야 한다. 


'밥풀을 닦는 행위'를 참말 고귀하고 가치 있게 인식해야만, 

누군가로부터 '밥풀을 닦이는 자기 자신' 또한 겸허히 수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

.

(덧. 가끔 아이들에게 경제 관념을 가르쳐주겠다며 설거지, 청소 등의 집안일을 한 대가로 용돈을 지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교육 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먹은 것을 씻고, 자신이 어지른 것을 치우는 일은 아르바이트 개념이 아니라 자조의 차원에서 교육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