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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Oct 23. 2024

그녀에게

09. 나도 여자랍니다.(1)

어젯밤, 그녀는 늦은 외출을 하고 왔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 덕분에, 기침에 콧물까지.. 몹시 피곤하신 듯 눈까지 빨개져 있었다.

"엄마.. 오늘은 그냥 패스?! 하고 자자"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을 보고, 나는 가볍게 툭 던졌다.


"나도 여자랍니다!!"

쌍심지를 켜며, 그녀는 통통한 양 쪽, 볼살이 흔들릴 정도로 소리를 꽥 질렀다.

"아.. 예.. 마마.. 어련하시렵니까?!"

피곤한 몸을 끌고, 냉큼 일어나서, 그녀의 얼굴에 팩을 냅다 붙여 드렸다.


그녀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6년째.. 진짜 하루도 빠짐없이, 1일 1팩(얼굴에 붙이는 그 '팩')을 하신다.

마치... 평생 밀려있던 아니, 소망했던 숙제라도 하는 듯.


까무룩.. 고개가 뒤로 넘어가며, 잠이 쏟아지는데도

그녀는 끝까지 버틴 채. 기필코, 20분을 다 채우고서야, 

얌전히, 팩을 얼굴에서 떼고, 침소에 드셨다.


시골집, 그녀의 초라한 화장대에는 그녀가 시집올 때 사가지고 온 화장품들만 놓여 있었다.

세월을 품고, 딱딱해져서 꽝꽝 얼린 초콜릿처럼 조각나던 섀도.

젤리처럼 말랑해지다 못해 섞어 비틀어져, 독한 냄새를 풍겼던, 립스틱.

스킨인지 로션인지 분간이 안 갔던 정체 모를 무언가 들...


국민학교 운동회 때면. 곰팡이 나는 화장품을 대충 찍어 바르고 왔던 그녀에게선 

늘 쿰쿰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엄마.. 얼굴이.. 꼭 도깨비 같다." (화장 실력 또한 "꽝"이었다.)

"시끄럽다.. 마 누가 본다꼬"

그러니깐.. 내 기억의 필름을 아무리 돌려봐도, 어떤 장면에서도 그녀가 '여자'인 적은 없었다.


엄마..아지매. 야!! (시커먼 아부지가 부를 때).. 형수.. 진화 엄마... 

그녀를 부르던 수많은 호칭 중에서도 '여자'는 없었으니깐.

 



그날은, 추석이 막 지나고, 

지금처럼, 딱 정신을 반쯤 놓기 좋을 가을바람이 불던 날. 저녁이었다.

그녀는, 저녁 설거지를 막 끝내려던 참이었고, 

우리 중. 누구는 숙제를 하고,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더랬다.

"쾅쾅쾅!!"

이때, 시끄럽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대문 잠가놨노"

그녀의 외침에 부리나케 뛰어 나가는 언니 뒤를 나도 하릴없이, 따라 나갔다.


'끼익'

언니가 잠겨있던, 녹슨 철대문을 열자,

술에 취해, 예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변한. 시커먼 아부지가 서있었다.

'술 마시가 기분 좋아 다행이네...'

잠시 생각을 하는데 순간, 시커먼 아부지의 허리를 감싸 안은 누군가의 손이 눈에 딱 들어왔다.

'누구지?'

나는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서,

대문을 연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망찰 서 있는 언니의 뒤통수

너머로 아버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사람을 봤다.


순간. 

하늘에 떠 있던 달빛이 온통 여자의 얼굴에만 비췄다.

(딱, 나만 '여주 <여자 주인공>'다란 느낌)

조막만 한 얼굴. 새까맣고 쌍꺼풀이 있던 눈. 쥐 잡아먹은 양 새빨간 입술..

(난 지금도 그 여자 얼굴을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한 마디로. 예.뻤.다!!)

짧은 순간, 나는 꽤 세세하게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이는 적으면 20대 후반... 많으면 30대 초반쯤 보이는 여자.

이모라고 부르기도.. 언니라고 부르기도 애매해 보이는.

여자는 새로 맞춰 입은 듯한 한복을 곱게 입은 채, 길고 탐스러운 까만 머리를 적당히 올려 묶은 채였다.

'저 예쁜 여자는 누굴까' 나는 갸우뚱 댔다.


"지금.. 뭐 하자는 기고?!"

순간, 구정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언니가 팔을 양쪽으로 쫙 벌려 그들을 가로막고 선 채로,

소리를 꽥! 지르자

"비키 봐라.. 인마"

시커먼 아부지가 가볍게, 언니를 밀어젖히고, 쥐 잡아먹은 새빨간 입술의 그녀를 끌어안은 채,

달빛 아래, 마치, 부르스를 추는 듯하며, 

마당을 건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쥐 잡아먹은 새빨간 입술의 그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휙 내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황진이다.. 아인가.. 성춘향인가..."

당최, 이 상황이 가늠이 안 되던 어리던 나는 잠시 짱구를 굴리며,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비키라.. 쫌!!"

언니는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휙 밀어젖히며, 내 앞을 퉁탕거리며, 지나갔다.


나도, 부리나케.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안방 문은 닫혀있었고,

부엌에선, 화가 나 팔짝 뛰는 언니를 말리고, 안심시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와 따신 물은 끼리노?! 뭐할라꼬..."

"참아라.. 엄마가 알아서 할게..."

나는 부엌에도, 안방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마루 가운데에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다.


이윽고,

그녀가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쟁반에, 제일 좋은 컵 두 개를 받쳐 들고 안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문을 여는 순간,

안방 아랫목에 온몸을 딱 붙어 앉아 있던,

시커먼 아부지와 엉거주춤 일어나며, 

그녀가 들고 들어가는 쟁반을 받아 드는 시늉을 하는 잡아먹은 새빨간 입술의 그녀가 보였지만,

내 코 앞에서 금세, 문이 닫혔다.

"아이.. 추석도 지났고 해서.. 행님한테 인사라도 꼭 드리고 싶어 갖고 왔어예"

코를 한 움큼 먹은 듯, 새빨간 입술의 그녀가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추석.. 행님..그제야.. 나는 어렴풋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아마도!! 이 상황은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런데... 잠깐!! 

방금 내 코 앞을 지나간, 그녀가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간, 컵 안에 분명. 달걀이 둥둥....!!

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아...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도 화가 치솟아 오르지만. 침착하게. 다시,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나의 시커먼 아버지가 바람피우고 있던 여자가(이후, 이전으로도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인사하러 오는 만행을 펼치자,

그녀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심지어, 달걀(당시, 달걀 값이 비싸서. 우리도 조금씩밖에 먹지 못했다. 내 꿈이 오죽하면 달걀집 남자한테 시집가는 것이겠는가?!)까지 둥둥 띄워 얹은 따뜻한 무언가를 대접했다.


--여기서 잠깐... 그녀가 달걀을 띄워 대접한 '따뜻한 무언가'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1. 커피다. : 내 생각이다. (그 시절, 우리 집에 쌍화탕 따위는 구경할 수 없었으므로)

2. 쌍화탕이다. : 언니 생각이다. (합리적으로다가, 달걀을 띄운 거라면.)

3. 꿀물이다 : 막내 생각이다. (이 친구는 당시, 아주 어렸으므로.. 그냥 헛소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날 뒷 이야기들을 들려드리고 싶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디오테이프가 딱, 그 뒷부분에서 찌지직 엉킨 것처럼..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잃어버린 테이프의 한 조각인. 그날 그 방 안에서. 

쥐 잡아먹은 빨간 입술의 (새파랗게 어린) 그녀와 마주 앉은

나의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화장끼 없는 퉁퉁 부은 얼굴.. 논밭처럼 갈라진 손.. 구멍 난 양말.. 인 채로.


코털만큼도, 시커먼 아부지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 손 치더라도

여자로서.... 나의 그녀가 받았을 충격과 상처는 지금의 나로서도 감히, 가늠이 안 된다. 




퇴행성 관절염 때문에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 앞 정형외과에 간다.

물리치료사 남자 선생님들은 그녀가 병원에 등장했다 치면, 우르르 그녀를 부축하러 뛰어나온다.

(육중한 그녀의 몸무게를 잘 알기에)

그러면, 바로 좀 전까지만 해도 "딸아.. 내 납두고(내버려두고) 가면 안돼"

하며,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녀는,  내 손을 휙, 뿌리치고,

남자 선생님들의 손을 양손에 꽉 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리 치료실로 들어가신다.

"우리 집에 아들이 없어서가.. 손 잡아준께.. 억수로 좋네. 호호호호"

그녀의 큰 웃음소리에 데스크 선생님들이 고개를 빼고 볼 정도다.


물리치료가 끝날 즈음. 그녀를 (물리치료용) 베드에서 일으키려 달려가면,

그녀는 양팔을 쫙 피고, 햇살처럼 웃는다.

나를 향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녀, 앞에 대기하고 있는 남자 물리치료사 선생님을 향해서다.

"딸아.. 니는 비키라, 선생님이 내 좀 안아주이소. 호호호호"


맞다. 요즘 그녀는 어리고 예쁜 어린 남자들을 유독 밝힌... 아니 좋아라 한다.

그리고, 매일 밤 팩을 붙이며 외친다.

"나도 여자랍니다!!" (그대 앞에 다가서면, 부끄럽고 떨리는 내 맘~~ 뭐 이렇게 이어지는 노래가사인데. 내가 가르쳤다.)


결단코, 그녀의 잘못이다. 

그때... 그 방 안에 앉아 있던, 시커먼 아부지의 뺨이라도 올려쳤더라면,

"썩 내 집에서 안 꺼지나" 하고, 쥐 잡아먹은 새빨간 입술의 그녀에게

구정물이라도 뒤집어 씌웠더라면.. 이제 와서, 젊은 총각들을 밝히는 할머니가 되어 있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딸아.. 저 총각 귀엽게 생깄네.."

나는.. 얼른 그녀의 입을 손으로 꽉 막는다. 

단골 미용실에서 일하는 노랑머리의 귀엽고, 잘생긴 어린 스텝을 눈 꽂고 보고 있던 그녀가 하는 말이다.


아.. 정말 어쩌면 좋을까?!


p.s 혹시, 젊은 남자분들.. 지나가시다 손 잡아 달라는 할머니 보면 도망가지 마세요. 헤치지 않아요!!

그저, 아직도, 여자이고 싶은.. 맘 속에 소녀를 키우는 할머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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