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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연하게 Nov 29. 2022

태어난 이유 - 1


태어난 이유란, 개성이 넘치는 시대에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를 순탄히 지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훌륭한 주제 거리다.



운명이나 우연, 목적과 즐거움 따위의 깊고 얇은 대답들 가운데 나는 원초적인 답을 운 좋게도 남들보다 빨리 알아차렸다.

정확하게는 나를 태어나게 만든 어른들에게 그 대답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너희 아빠가 애교 많은 딸 하나만 낳아주면 정신 차리겠다고 했거든.”     


언제였던가, 어머니가 아직 집을 나가시지 않았던 무렵 그의 꽃무늬 치마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였다. 기대 없는 가벼운 질문에 돌아온 답은 제법 구체적이다. “왜 나를 낳았어?” 쓸데없는 없는 질문의 답은 꽤나 충격이었다. 기껏해야 ‘그냥’이나 ‘어쩌다 보니’의 실없는 답을 원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랑으로 낳았다는 동화 속 따듯한 이야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지.     


하여튼 간에, 제법 구체적인 답변은 그간의 제 행실을 돌아보게 했다.     


아직 두 자릿수도 되지 않은 어린 인생이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시에는 본인이 최고로 성숙하다 생각하는 법이다.


아이는 그간 얼굴을 피하게 할 정도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아버지를 피해만 다녔었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 버릇없다고, 고개를 숙이면 아비를 보체도 안 한다고 온갖 이유를 대며 괴롭힌 당사자. 아이의 인생에 괴물과도 같은 사내에게 애교를 피운다니, 상상하기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로 인해 작은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나 없는 형편 속, 나의 출생 이전에 낙태된 몇몇 아이들과 달리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는데 간신히 성공한 사실은 자신을 알 수 없는 공포로 떨리게 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위협, 자리가 온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파급은 굉장했다. 만약 정말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에게 애교를 피웠다면 우리 가정을 바뀌었을까?     


밖으로 나돈다고 여력이 없는 형편이 피고, 어머니가 제 옆에 계속 붙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건 천국과 다름없다. 듣기 싫은 호통 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귓가에 머물러, 식탁 위에는 꽃 한 송이가 매번 꽂혀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뤄질 수 없다는 결과를 이미 한 구석에서 알고 있지만, 아둔한 마음은 혹시나 하며 가능성을 계속 점쳐본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뚜렷한 목적이 있었음을 안 뒤로 수시로 기회를 엿보았다.


큰 임무를 맡은 어린아이의 비밀 놀이 같은 프로젝트였다. 사내가 들어오면 평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심부름에도 웃는 낯을 연기하려 애를 쓴다. 키 차이 때문에 멀대처럼 느껴지는 사내는 지저분한 옷차림으로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지나칠 뿐이다.


노력이 턱없이 보잘것없어 효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바뀔 생각이 없었던 건지. 아이는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자괴감 비교적 빠르게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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