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불의 시대, 조선불교의 대들보
▲ 벽송사 상단에 있는 옛 절터 풍경. 보물47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고, 미인송(굽은 나무)과 도인송이라는 특이한 모습의 소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여름 한철, 사람의 물결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지리산 자락으로 어느새 가을의 색채가 묻어나기 시작한다. 칠선계곡을 품고 있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추성리는 아직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풍경이다.
벽송사 산문으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도로를 오르다 보면, 마치 수문장처럼 길을 지키고 있는 목장승 두 기를 만나고, 이내 주차장으로 길이 이어진다. 절집 입구의 일주문, 금강문, 그리고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동선이 없는 것은 뜻밖이다. 108명의 ‘선교겸수 대 조사’가 출현했다 하여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고 불리어 왔고,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한국 선불교의 종찰이라는 사격에 비춰보면 파격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게다가 넓은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전각들은 대부분 스님들의 수행처인 선방이고, 참배 공간은 언덕 좁은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원통전과 산신각뿐이다. 그 아래 웅장하게 들어서 있는 선방들의 규모에 비하면 터무니없다 할 정도로 협소하다. 사람들의 오고감을 크게 개의치 않는 수행도량으로서의 자부심이 가람의 구조와 절집에 이르는 과정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벽송사의 예불공간인 원통전과 산신각. 언덕 좁은 터에 비켜있듯 자리잡고 있다.
‘푸른 소나무’를 의미하는 ‘벽송’은 1520년 벽송 지엄(1464~1534년)이 옛 절터였던 이곳에 절집을 중건하며 자신의 당호로 절 이름을 삼은 데서 유래하였다.
벽송 지엄은 무관 출신으로 북방의 여진족 토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28세 때에 출가를 하였고, 계룡산, 금강산, 용문산 등의 사암을 돌며 정진하다가 벽계정심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님의 나이 57세 되던 해에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벽송사를 짓고 수행에 정진하였으며, 부용영관(1485∼1567)과 경성일선, 숭인 장로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특히 2대조사인 부용영관은 그의 문하에 청허휴정과 부휴선수를 길러내어 조선불교의 법맥을 잇게 하였고, 청허와 부휴 두 선사의 문하에서 역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배출되며 꺼져가던 조선불교를 지탱하고 중흥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에는 '청허와 부휴의 법맥을 계계승승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양란(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 초토화된 지리산 절집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벽암각성은 바로 부휴선수의 제자이고, 잘 알려진 대로 사명대사 유정은 청허휴정의 제자이니 벽송산문이 조선불교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벽송문중에서 배출한 스님들은 백두대간 마루금인 지리산 주능선을 사이에 두고, 하동 화개와 구례의 쌍계사, 칠불사, 신흥사, 연곡사, 화엄사 등 지리산의 절집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특히 청허휴정, 부휴선수, 벽암각성, 소요태능 등 스님들의 행적은 오늘날에도 승탑 등 유물유적이나 유람록 등의 기록으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벽송지엄이 입적하고 난 후에는 그의 제자 숭인, 설은, 원오, 일진 등이 사리를 수습하여 석종(石鐘)을 만들어 비명을 새기고, 하동의 의신사 남쪽 산기슭에 봉인하였다고 전해진다.
▲미인송(왼쪽)과 도인송(오른쪽)
벽송사 원통전 뒤 언덕에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을 오르면 평평하고 트인 너른 공간이 나오는데, 바로 벽송사 옛 절터이다. 삼층석탑 한 기, 미인송과 도인송이라는 소나무가 마치 알면서도 서로 모르는 척 태연하게 서있는 듯하다. 문득 허백당 성현이 ‘벽송당기(碧松堂記)’를 지을 때, 벽송지엄과 나눈 대화 내용이 떠오른다.
“물상의 종류가 참으로 많은데 어찌하여 유독 소나무에서 당호를 취하십니까?”라고 성현이 묻자, “소나무의 가지와 잎이 층층이 층을 이루어 무성히 자라는 것은 우리 중생이 모두 큰 지혜를 우러러 그 지혜에 의지하고 비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벽송 지엄은 대답하였다고 한다.
암울한 억불의 시대를 극복하고 오늘 날의 불교로 이어질 수 있도록 활약한 벽송문중의 수많은 선지식들을 떠올리며,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숲을 이룬 ‘푸른 소나무’에 머리 숙인다. [201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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