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초 코로나19가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하고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때는 석사 마지막 학기였다. 백수지만 할 일이 있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논문에 집중하며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열악한 처우에다가 쉽게 잘리는 직업에 대한 회의감과 마음속 우울에, 기운도 기분도 거의 항상 밑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족들이 신경을 많이 써 준 덕에 더 이상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어졌다. 그래서 그런가 엄마는 다시 자신의 우울한 심정을 몇 번 토로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밖에 나가는 것도 조심하게 되자 더 심해졌다. 그래도 전처럼 심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 하나 감당하기도 벅찼던 나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게다가 지금 당장 생계가 끊긴 사람도 태반인데, 엄마는 나들이 못 가고 교회 못 가는 거 빼고 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란 말인가 싶었다. 어느 날, 나들이를 못 가서 우울하다는 엄마에게 참다못해 소리쳤다.
"오늘 어떤 사람이 코로나19 때문에 생계가 끊겨서 자살을 시도했대. 지금 전국이 이렇게 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혔다고 난리인데, 엄마는 나들이 하나 못 가는 게 그렇게 힘들어?!"
엄마는 살짝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나가고 싶다, 답답하다, 힘들다, 잠이 안 온다 등의 부정적인 말은 누가 물어보지 않는 이상 먼저 말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들으니, 엄마는 그때 내 말을 듣고 내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저렇게 말하면 안 되었다. 남이 더 힘들다고 해서 엄마가 안 힘든 건 아니다.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해외에서일하면서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어 친구나 지인에게 털어놓았을 때, "너는 그래도 해외에 살잖아. 한국은 얼마나 힘든데."라든지 "너보다 힘든 사람 많아."라는 말을 많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저 말을 하고도 후회했다. 하지만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 줄 공간이 내 마음속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에 따로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편하려고 엄마의 입을 막아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엄마의 우울증을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지난 경험들을 생각해 보면, 우울증은 주변 사람의 관심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은 '우울 장애'라는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다. 우울증 근처까지 갔었기에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닌 병이라는 걸 실감했다. 병은 의사가 치료하는 것이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저 다른 가족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엄마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더 이상 우울증에 대해서 격려나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고, 우울해하는 기색이 보이면 자리를 피했다.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언니와 동생은 관심을 보였지만, 동생은 타지에 있는 대학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언니는 결혼해서 따로 살았기 때문에 엄마는 집에서 혼자 우울증을 견뎠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후, 나에게 일이 생겼다. 유치원에서 진수(가명)라는 다문화가정 아이 한 명을 하루 2시간 전담해서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에세이 책 <우리는 함께 자란다>에 있는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진수는 한국어도 친구들에 비해 잘하지 못했고 언어도 태도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유치원을 싫어했다. 나는 다문화가정 아이, 그것도 유치원생을 가르치는 일이 처음이었고 진수의 당황스러운 행동과 말에 우여곡절을 몇 번 겪었다. 그리고 아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뭘까,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많이 했다.그 모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진수에게 집중하면서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나 또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진수를 단순히 나의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게 되었다. 진수는 나와 유치원 선생님들, 가정에서의 노력으로 결국 문제가 되었던 것들을 거의 고치게 되었고, 그렇게 싫어하던 유치원 생활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진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작은 아이도 내면은 복잡하고도 깊구나.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구나. 아이도 이러한데 한 사람의 성인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까.'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진수에게 한 것처럼 노력을 했을까? 그냥 놀아 주고 한국어를 가르치고 옆에 있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읽어 줄 동화책을 찾고 유아 교육에 관련된 책을 읽기 위해 자주 도서관에 가고, 밤늦게까지 진수를 위한 종이접기를 만들고, 아이가 좋아한다는 유튜브 채널을 돌려 보고, 내가 하는 일이 아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엄마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식이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역으로 자식이 부모를 보살피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인데도 불구하고 자식을 힘들게 하는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의 몸에서 나오고, 엄마의 사랑과 희생으로 자라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같이 지냈으니 엄마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도 나는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고도 난 여전히 엄마의 우울증을 외면했다. 엄마 자체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모녀 사이는 좋았지만, 우울증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가 전처럼 다시 우울증의 영향을 받는 게 두려웠다. 그때 느꼈던 절망감과 어둠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옛날부터 나는 엄마의 감정에 쉽게 공감되어, 엄마가 화를 내거나 울면 나도 울었고 심지어 무서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야 웃는 일이 많아졌는데, 엄마의 우울증에 또 관여하면 나는 또 빠르게 엄마에게 동화되어 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다행히 엄마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하는 진수 이야기를 좋아했다.나는 세종학당 한국어 파견 교원에 다시 합격했다. 하노이에 파견을 가야 했지만 코로나19와 비자 등의 문제로 국내에서 온라인 수업을 했고, 즐겁고 보람 있게 일했다. 그리고 책도 출간했다. 동생은 대학원에서 연구 성과를 올리고 있었고 언니는 임신을 했다. 엄마는 입덧이 심한 언니를 챙겨 주느라 바빴다. 좋은 일도 계속 생기고 몸도 바빠지자 엄마는 점점 괜찮아지는 듯했다.
2021년 여름, 엄마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항우울제를 임의로 줄이는 것이었다. 엄마는 몇 년을 약에 의존해서 산 만큼 약에 대한 걱정도 많았다. 이러다가 약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는 건 아닌지, 치매에 걸리는 게 아닌지 두려워했다. 그러다 이제 상태가 좀 괜찮아졌으니 슬슬 약을 줄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나 이제 약 줄여 보려고. 약 없이도 한번 이겨내 보려고."
"잘 생각했어! 안 그래도 엄마가 몇 년 동안 계속 약 먹어서 걱정했었는데. 들어보니까 약에 내성도 생긴다고 하고, 나중에 치매에 걸리기 쉽다고도 하고... 결심 잘했네."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조언은 이렇게 위험하다. 약을 줄여서는 안 되었다. 약을 임의로 줄이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찾아보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나는 벼랑으로 가겠다는 엄마를 응원한 거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