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리는 날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열지 않았기에 내리는 빗소리도, 비의 냄새도 느끼지 못하였으나 닫힌 창문을 너머로 보는 바깥의 촉촉한 풍경은 내게 이상한 욕망을 상기시켰다.
비가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그것이었는데 답답하게 흩뿌리듯 내리는 비처럼 내 일상에서 조금씩 쌓여온 근심들이 내 마음을 오랜기간 끈적하게 잡아당기고 있었기에 시원하게 비가 쏟아져 내 근심과 함께 모든 걸 씻겨줬으면 하는 욕망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장에라도 창문을 열어젖히고 '쏴아-' 하는 빗소리와 함께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흐름을 흠뻑 느끼고 싶었다.
보슬비보단 장대비가 시원하지 않은가? 어젯밤 늦게 잠이 들어서인지 그녀는 피곤힘을 토로하며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었다. 비몽사몽 이어지지 않는 문장을 이어 붙이며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올바르게 잠을 청하지 못한 그녀의 몸이 걱정스러웠다. 잠결에 커피를 한잔 내려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부엌으로 걸음을 옮겨 커피머신에 커피캡슐을 끼워 넣었다. 딸깍!하는 경쾌한 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공간에 활력을 불러왔다. 며칠 전 그녀가 내게 준다고 선물해 준 녀석이다. 학생시절 들어둔 보험이 만기 되어 나온 금액 중 일부로 내게 선물을 해준 것인데, 물건에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생각지 못한 그녀의 선물은 너무나도 감사했다. 나를 생각해 주는 어여쁜 마음과 함께 본인에게 쓰지 않고 내게 내어놓았다는 사실에 미안함도 느껴졌지만 감사히 받아 사용하는 것이 보답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달콤한 마키아토 한잔과 씁쓸한 아메리카노 한잔이 오늘의 메뉴이다. 마키아토는 그녀의 몫, 아메리카노는 내 몫이다. 쓴 커피는 질색하는 그녀와 달리 난 적당히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깔끔하니 입에 맞다. 커피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부스스한 얼굴로 걸어 나온 그녀는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테이블 앞에 앉아 알맞게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는 모습이지만 왜 실없이 웃음을 흘리는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그녀는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방 전까지 나를 우울하게 만들던 근심들이 잊히는 느낌이다.
그 순간 문뜩 떠오른 생각 하나
'아, 이 사람이 내겐 장대비 같은 존재구나!
아니, 어감이 좀 강렬한 느낌이니까 봄비라고 하면 더 잘 어울리겠다.'
그렇게 창밖에도 내 마음속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