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러다 팀장님 한테 시계로 맞아"
친구들이 나를 놀렸던 내용이다. 팀장님께 보고드릴 때 많이 떨었다고 말했더니 그때부터 친구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면접은 어떻게 봤냐고, 손목 시계로 맞는 거 아니냐고 농담했다. '오늘은 몇 대 맞았어?' 하면 '3대~' 하면서 받아쳤지만 당시에는 그게 회사 생활의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사람에게 경험이 중요한 건 그런 일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에 닥치면 '내가 이럴 때는 이런 행동을 하는 구나'라며 생각할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뜻밖의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고 몰랐던 약점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전교 1등만 하던 모범생이 연애에서는 전혀 잼병일 수도 있고 반에서 꼴등만 하는 학생이 게임에서는 늘 1등 일 수도 있다. 뭉툭한 모양의 조각상이 여러 번의 망치질로 선명한 실루엣을 갖추듯 그렇게 다양한 경험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학에 입학하고 하나 발견한 게 있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쉽게 떠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삼수 끝에 대학에 입학했던 22살 때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자기소개라도 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떨려 당당하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중고등학교 때 회장, 부회장도 더러 했기에 이런 내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재수하고 삼수까지 하다 보니 더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버렸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이 싫어 여러가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심리 전문가와 정신과 의사들이 저술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책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상처', '트라우마', '마음속 어린아이' 같은 단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 받은 어린 시절이 있다고, 그게 어른이 되어서도 일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듣고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떠는 이유가 과거의 상처들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상처를 받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그런 상처를 보듬으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표가 생겼다. 마음 속 상처를 위로할 수 있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목표였다. 상처를 받아서 관계에 소극적이 된 게 맞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예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다, 라는 희망이 생겼다.
또 하나의 노력은 나를 사람들 앞에 노출시키는 훈련이었다. 여러 모임에서 모임장을 맡으려고 노력했다. 20대는 '그릇을 넓히는 시간'이라고, 리더로서 생활하다 보면 내 그릇이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장교가 되기 위한 ROTC 활동, 축구 동아리, 봉사 활동 동아리 등 속했던 여러 모임에서 리더가 되었다. 군 생활을 장교로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을 기르다 보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 4년과 군생활 3년, 총 7년을 리더십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갈등을 조율해야 할 때도 있었고 곤란한 상황에서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리더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사람으로서, 당당한 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 동문회관에서 진행된 전역 행사에서 나의 바람은 산산이 무너졌다. 동기들이 한 명씩 단상에 올라 이루고 싶은 꿈을 이야기하는데, 내 차례가 올 수록 떨리기 시작했다. 연단에 올라 글을 쓰고 싶다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떨렸다. 당당한 동기들과 달리 자꾸 떨리는 발성에 허공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의 떨림을 잊을 수 없는 건 7년간의 노력이 허망하게 느껴진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나를 돌아보고, 사람들 앞에 나를 노출시키는 훈련을 했는데 결국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나는 22살의 나, 새내기 모임에서 떨고 있던 나였다. 이게 뭐지, 결국 이러려고 7년을 보낸 건가, 싶었다. 그리고는 문득 시지프스 신화가 생각이 났다. 죽을힘을 다해 바위를 산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게 다시 밑으로 떨어지는 형벌. 시지프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노력했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을 치르고 가족끼리 대화할 시간이 필요해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데 막내 이모가 벌벌 떨며 말했다. 명절 때 만나면 조카들에겐 '이 새끼가~ 이년이~"하는 살가운 이모였는데 막상 속 마음을 얘기할 때는 떨고 있었다. 아빠보단 엄마를 닮은 나였고 엄마와 유독 닮은 이모였다. 결국은 이모와 나는 닮았다_라는 생각이 이어졌고 그 끝엔 깨달음이 있었다.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라는 것이었다.
원래가 쉽게 떠는 사람이었다. 상처를 받고 트라우마를 겪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원래 잘 떠는 사람, 원래 마음이 민감한 사람이었다. 아래 글을 한번 보자.
안타까운 소식은 상대적으로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똑같이 슬픈 일을 겪더라도 우울의 강도가 더 높고, 공감능력이 높아서 남의 고통까지 내 고통으로 느끼고, 감정의 동요를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죠. 자존감이 낮은 것도 여기에 영향을 줄 것이고요. 아무튼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훨씬 민감하게 일어나서 상대적으로 사는 게 녹록지 않은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How are you? 내 마음, 김혜령> 중에서
상대적으로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원래 마음이 말랑하고 타고나길 여러 자극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특히 사람들의 시선과 말, 행동에는 유독 그랬다. 호수가 작은 빗방울에도 물결을 일듯이 내 마음은 사람들 앞에만 서면 찰랑거리는 물결이 되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인정해서 일까, 그걸 바꾸고자 노력했던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게 되어 감사했다. 마음속 어린아이를 탓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사는 게 아니라 그런 상처쯤은 살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일들이라고, 괜한 과거의 상처를 되새기며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과거의 일들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었음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슬픈 게 있다면 7년의 시간 동안 내 마음을 미워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내 마음을 사랑하며 살려고 한다. 잘 떠는 내 마음을 '나약한 마음'이 아니라 '섬세한 마음'으로 선택하고 그에 맞는 행동 양식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가끔은 떠는 게 불편하고 종종 그런 게 못나보여도, 이제는 괜찮다고, 섬세하기에 오히려 느끼는 게 많고 그러기에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려 한다. 그렇게 얻어지는 여러 감상들을 글로 엮어 그런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마음 한 곳을 울리는 삶,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분명히 또 어떤 낯선 상황에서 낯선 이들과의 순간을 힘들어할 것이다. 스스로를 드러내기 불편해하며 목소리를 떠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 그런 잠깐의 순간보다 매 순간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내가 좋다. 더 많이 공감하고 더 많이 표현할 수 있는 내가 좋다. 바위를 산 위에 올려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조금 떨어도 괜찮을 용기가 생겼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