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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Dec 17. 2020

코로나 블루의 시대

우리는 코로나 블루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 블루>란 코로나와 우울하다는 뜻인 블루의 합성어로,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자가격리와 경제 위기 등의 이유로 불안장애로까지 발달하는 경우를 말한다. 국내에서는 코로나가 3차 대유행을 시작해 확진자가 며칠째 1000명 안팎을 오가고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 거리 두기가 3단계까지 논의되고 있다. 11월 말부터 확진자가 급증해 줄줄이 잡혀있던 송년회 약속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 1년 전에 잡아 놨던 약속이든 불알친구들과의 약속이든 지금 상황에서는 예정대로 진행할 수가 없다. 괜히 서로에게, 또는 일상을 함께하는 주변인에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말이 따뜻한 이유는 '송구영신'의 의미가 있어서다. 모질고 힘든 1년이었어도 이제는 그만 힘들고 앞으로는 더 행복하자고, 지나갈 한 해를 잊어보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생한 마음을 술 한잔에 나누고 '땡'하는 소리로 제야의 종소리가 최면을 걸면 한 해 동안 쌓여왔던 힘든 마음을 잊고(잊자고 다짐하고) 새해를 맞이할 수가 있다. 연말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되고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다짐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면 따뜻한 연말마저 포기해야 한다. 어느 때보다 힘든 한 해였는데 송년마저 할 수 없을 것 같은 요즘, 이 문단을 쓰고 있는 오늘 12월 13일은 103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송구영신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일상


일상이란 매일매일 반복되는 보통의 일을 뜻한다.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업무를 보고, 친구를 만나고, 하루하루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일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코로나로 인해 답답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둔감하고 어쩌면 비교적 무하게 코로나 시대를 살아왔는데 요새는 코로나가 빼앗아간 일상에 꽤나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1차, 2차, 3차 대유행을 지나면서 나아질 듯 아닐 듯 반복되는 긴장과 이완 속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다. 이제는 지인 중에도 밀접 접촉자가 나오고 있고 회사에서도 어느 부서의 누가 그렇다더라 하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다. 사냥꾼이 포획 범위를 좁혀 가듯 코로나가 점점 더 내 주위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긴장감은 더해가고 벗지 못하는 마스크에 턱 하니 숨이 막힌다.


내가 코로나에 무감각했던 이유는 직접 받은 피해가 없기 때문이다. 회사는 여전히 다니고 있고 급여가 깎였다거나 강제로 무급 휴가를 써야 하는 일은 없었다. 코로나에 걸려 폐기능이 손상된 것도 아니고 동선이 공개되어 사람들에게 사생활이 노출된 것도 아니다. 일요일마다 하던 축구가 자꾸 취소되어 가끔 서운한 적도 있었지만 일상이 크게 변한 건 없다고, 나보다 힘든 사람도 많은데 뭐, 하며 지내온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자꾸 답답하고 연말이 길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내 일상에도 코로나로 인한 작지만 분명한 변화는 많았다. 가장 첫 번째가 마스크인데 하루 종일 마스크를 끼다 보면 귀도 아프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안 그래도 답답한 사무실에서는 그게 특히 심하다. 출근해서 오후쯤이 되면 속이 메슥거리고 단지 정신적으로 예민한 게 아니라 실제로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헛구역질이 나온다. 자꾸 울리는 확진자 문자에 신경은 곤두서고 잠깐이라도 외출하면 뭐라도 손에 묻었을까 싶어 찝찝한 마음으로 소독제를 찾는다. 이런 상황에도 뉴스에는 마스크를 끼자는 편의점 주인을 폭행하는 파렴치한이 등장하고 이렇게 힘든대도 여전히 서로 네거티브만 하는 정치 뉴스가 요즘 따라는 왜 이렇게 미워 보이는지, 적어도 이럴 때는 여야가 한 마음으로 국민을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니야?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코로나 때문에 너무 힘들다, 코로나 때문에 죽을 것 같다, 라는 말을 하려는  아니다. 나보다 힘든 사람이 많은 걸 알고 그들이 처한 상황도 알고 있다. 코로나에 걸려 8년을 준비한 임용고시를 응시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직장을 잃거나 운영하던 가게를 폐업시킨 사람도 있다. 어제는 발달 장애인의 부모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아이를 데리고 학습센터에 가는 길이 전쟁이라고 했다. 자꾸 마스크를 벗어버리는 아이 때문에 아침마다 고생이라고, 그게 힘들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내가 느끼는 작은 불편함이 별거냐,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가 전쟁인 분들에 비하면 내 일상의 답답함은 그냥 참는 게 맞지, 라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목욕탕 열탕에 몸을 담근 것 같은 느낌이랄까, 숨은 쉴 수 있어도 자꾸 뭔가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런 매일의 연속이고 그런 느낌이 자꾸 드는 건 분명히 내 마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실감이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행복에도 평균이라는 게 있다. 꿈에 그리던 기업에 입사하고, TV 오디션 프로에서 순위권에 들고, 공모전에 1등으로 입상하거나 로또를 맞는 등의 행복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말하는 행복의 평균이란 매일매일의 행복, 하루하루를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느냐를 말한다. 지금을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하루를 돌아보았을 때 오늘을 얼마나 행복했다고 느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표현이다.


내가 요새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일상의 큰 줄기는 바뀐 게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하루하루가 삐쩍 마른 느낌이다. 이런 상황이 1년이나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무던하게 넘기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매일 작은 행복을 쌓으면 결국은 행복한 인생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불행도 그게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감당하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하루의 행복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작고 보다 더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식하지 못했던 일상의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기분을 좌지 우지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가령 확진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매일 주변에서 듣는 것도 그 자체로 소음이고 이제는 일상이 된 스트레스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불행들이 요새는 이곳저곳에 더러 많이 생긴 것 같다. 거기서 피로가 많이 쌓였지 싶다.




사실 '나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건강하고 젊으니까 그래도 나는 괜찮겠지, 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만 혼자 괜찮을 수는 없다'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는 사회 속에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는 환경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함께 사는 이들이 가진 불안과 스트레스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되고 그런 분위기는 분명 내 정신과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자녀를 등교시킨 후의 휴식의 시간을 빼앗긴 주부들, 외로운 하루를 달래고자 노인정에 찾던 노인들, 생계가 어려워진 자영업자들, 무기한 무급휴가를 하고 있는 여행사와 항공사의 직원들, 비록 주변에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일일이 말하기 어려운 이곳저곳에서 사회 전체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낀 채 그런 뉴스와 기사를 보고 접하면서도 나는 괜찮다고, 그럼에도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감이 아니라 값싼 오만이었고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무관심이었다.


유럽에서는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내년이면 치료제도 나온다고 한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있어도 이제는 길었던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코로나 시대를 견뎌내는 마음 가짐을 달리해야겠다. 그리고 코로나가 하루빨리 끝나기를 염원해야겠다. 나는 괜찮겠지, 라는 생각은 버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만간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기원해야겠다. 코로나 시대, 아니 코로나 블루의 시대, 어서 끝나기를 바란다.







* 코로나 블루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b1238

*일상 : https://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09297&supid=kku000266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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