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는 이틀째 학교에 오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 오락실에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뒤였다. 한시라도 빨리 동수에게 지난 토요일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어 월요일부터 아침 일찍 학교에 왔지만 동수는 다른 친구들이 다 등교할 때 까지도 자리에 오지 않았다. 나는 뒤가 불안한 금고 도둑처럼 동수의 빈 의자와 교실 뒷문을 자꾸 바라봤다. 하지만 1교시 시작 종소리가 울릴 때 까지도 동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동수가 눈에 밟혔다. 쉬는 시간에 창문으로 가 학교 출입문과 동수가 자주 가던 철봉 옆 모래사장을 살피기도 했다. 동수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일이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것보단 나았다.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수업이 끝나 하교할 시간이 되었다. 다음 날이 돼서도 동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오늘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불안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혹시나 오후라도 등교할까 싶기도 했다. 결석도 조퇴도 종종 했지만 이틀 연속 그랬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 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종례를 마치고 모두가 반을 빠져나갈 때 나는 실내화 주머니를 놓고 온 척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책상에 가서 동수네 전화번호와 주소를 노트에 적었다. 적는 데 뭔가 마음이 급했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등골이 서늘했다. 받아 적은 연필의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전화번호를 적은 뒤 주소를 적을 때는 연필 끝이 망설여졌다. 집이야 이미 두 번이나 가봐서 어딘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엔 주소까지 모두 적었다. 동수도 우리 집 번호와 주소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유야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결국 그 생각이 나서 주소를 끝까지 적은 건 사실이다. 동수도 적었으니, 나도 적어야 했다.
학교를 빠져나와 학교 후문 바로 앞쪽에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내가 알기로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가 거기에 있었다. 학교에도 있었지만 일단 학교는 벗어나고 싶었다. 동수는 왜 학교에 오지 않았을까. 혹시 나 때문일까. 그 생각이 어제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토요일에 만난 동수는 그간 내가 봐온 동수 중에 가장 밝은 모습이었다. 게임에서 져도 웃었고 나에게 라면을 사줄 때도 웃었다. 그는 그날 엄마를 만났다고 했다. 그게 그가 기분이 좋았던 이유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혹시 나랑 놀아서 기분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낯설긴 했어도 동수와의 시간이 재밌었다. 생각보다 동수는 말수도 많았고 뭔가 같이 있기 편하기도 했다. 오락을 좋아한다는 것도 비슷했다. 그랬던 동수인데 이틀 만에, 아니 하루 반나절 만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틀이나 학교에 오지 않는 것일까. 내가 그를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일하게 잠시나마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자기를 버리고 내가 도망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동수는 원래도 결석이 잦은 아이였다. 겨우 나 때문에 학교까지 나오지 않는다고? 그것도 좀 이상했다. 그럼에도 내 탓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있었다. 그의 상황을 알고 싶었다. 공중전화로 걸어가는 데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 곳곳에 보였다. 아파트 앞에 바로 학교가 있어 우리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이 단지에 많았다. 상가 슈퍼 앞에서 두 명이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었다. 벤치에 가방을 던져 놓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한 열명 정도가 '경찰과 도둑'을 하고 있었다. 태권도 학원의 노란색 승합차가 단지 내를 지나가기도 했다. 나는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공중전화박스에 도착했다. 두대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한대에는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남은 자리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주머니엔 백 원 동전 네 개가 있었다.
공중전화는 어른 용인지 동전을 넣기도 수화기를 잡기도 힘들었다. 팔을 위로 쭉 뻗어서 해야 했다. 번호를 누르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친절하지만 기계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입력하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번호를 잘 못 입력했는가 해서 노트의 번호를 하나하나 신경 써서 눌렀지만 역시나 같은 응답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 교실에서 번호를 적을 때 숫자 하나하나 똑바로 적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실 누군가 나를 볼까 성급하게 적은 것 같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교실에 왔지만 이미 문이 앞뒤로 잠겨 있었다. 창문도 잠겨 있었는데 하나하나 만져 보니 앞문과 뒷문의 정중앙에 위치한 창문 하나가 잠겨 있지 않았다. 그걸 열고 좌우를 한번 살피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에 올라 교실 바닥으로 점프할 때는 만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냥 나 자신이 멋있어 보였다. 착지할 때 발목과 무릎에 느껴지는 탄성이 좋았다. 선생님 책상으로 가서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이럴 리는 없었다. 나는 노트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적었던 것이다. 결국 연명부에 적힌 동수네 집 전화번호는 실제로 없는 번호였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번에는 그냥 학교 공중전화로 가서 한번 더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없는 번호였다. 전화가 안되니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그나저나 왜 없는 번호가 선생님 책상에 적혀 있는지 의아했다. 원래부터 잘못된 번호가 적혀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사정으로 전화를 못쓰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문득 동수 집에 가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동수가 집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혹시나 동수의 아빠를 마주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일단 당분간은 그쪽 동네에 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일요일의 그 녀석들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일은 동수가 학교에 올 수도 있었다. 괜히 동수가 미웠다. 내가 뭘 잘 못했다고 이렇게 혼자 고민하고 있는 건지, 만나면 엉덩이라도 한번 차주고 싶었다.
다음날이 됐다. 그리고 동수는 오늘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담인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동수가 왜 학교에 오지 않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선생님에게 공개적으로 물어보는 친구도 없었다. 선생님은 아침 조회를 마치고 교실을 나가 교무실이 있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뛰어갔다.
"선생님"
"어, 희원" 선생님은 나에게 목소리를 냈지만 뭔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알맹이가 없다고 할까.
"박동수는 왜 안 나오는 거예요? 월요일부터 안 나왔는데"
선생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공항 검사대 보안요원 같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프다는구나"
"감기 걸린 건가요?"
"왜? 궁금하니?"
선생님은 손목에 두른 금장 시계를 한번 쳐다봤다.
"그냥요. 궁금해서요.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선생님은 다시 돌아 교무실로 향했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복도 벽에 울렸다. 높은 굽은 아닌 것 같은데 날카롭고 각진 소리가 귀를 찔렀다.
점심은 카레에 동그란 돈가스가 나왔다. 점심을 먹고 세면장에서 수저를 씻었다. 물기 묻은 수저를 두 번 털고 수저집에 집어넣었다. 수저집 지퍼를 올리는 데 드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수네 집에 가봐야겠다,라고. 아무래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동수가 우리 집에 찾아와 나를 기다렸듯, 나도 동수네 집에 찾아가 그를 만나고 싶었다. 오후 수업을 듣는데 자꾸 다리를 떨었다. 내가 다리를 떤 건지 다리가 나를 떤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생각해 보니 지금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계주 선수로 뛴 운동회 전날이었다. 원래 나는 반에서 달리기가 3등이었는데 2등이었던 친구가 운동회가 있던 주에 발가락을 삐었다. 태권도를 하다가 다쳤다는 것이었다. 2등까지 계주 선수였고 자연히 3등이었던 내가 2등 대신에 운동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도 뭔가 다리를 심하게 떨어야 마음이 편했는데, 지금이 그때와 비슷했다. 다리가 나를 떨게 했고, 내가 다리를 떨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하교 시간이 되었다. 하늘은 익은 숯색깔과 비슷했다. 비가 언제 내려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가방에 우산은 없었다. 그렇다고 우산을 구할 곳은 당장 없었다. 비를 맞고 돌아다니면 엄마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다. 그냥 그러기로 했다. 동수 네로 가는 길엔 길목 길목을 경계했다. 혹시 토요일의 악당들을 마주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동수네 집에 도착했다.
동수네 집에 오니 주말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빌라 사이 골목을 벗어나려는데 동수가 나를 때리고 내 팔은 움직이지 않는 꿈이었다. 이 동네의 분위기는 꿈에 내가 있던 곳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꿈에서는 빨간 벽돌로 된 빌라 사이에 있었는데 이곳은 빌라촌은 아니었다. 주택가였고 다만 주택들이 빨간 벽돌로 되어있긴 했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한낮인데도 동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동수네 옆 집 앞에는 봉고 트럭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 밑으로 작은 누렁이가 눈으로 나를 좇았다. 몸은 미동도 없었고 곧 울 것 같은 눈동자만이 나를 바라봤다. 가만 보니 왼쪽 앞발에는 다친 듯 핏자국이 보였다. 동수네 집은 대문이 열려 있었다. 정확히 동수네 집은 이 주택의 지하방이었고 실제 이 집주인이 누군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이 집 대문은 초록색이었는데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어졌고 가장자리 쪽은 녹이 슬어 만지면 피부병에 걸릴 것 같았다. 트럭 밑의 누렁이가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아 신경 쓰였지만 일단 열린 대문 사이로 주택에 들어갔다. 문틈은 삼십 센티 정도였고 문을 건드리지 않으려 몸을 얇게 만들어 옆 걸음으로 들어갔다. 어려울 것 같았는데 문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실력 있는 도둑이 된 것 같았다. 안쪽도 엉망이었다. 문 옆쪽의 화단에는 파란 물조리개가 뒤집어져 흙이 묻어 있었고 화단의 식물들은 언제까지 살았는지 줄기 밑 부분만 남아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오래 있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일단 동수가 사는 지하 방으로 향했다. 이곳에 온 이상 벨이라도 한번 눌러보아야 했다. 지하로 가는 계단은 주택 현관 기준 좌측으로 돌아가야 했다. 시멘트로 된 계단이 있어 내려갔다. 겨우 스무 계단 정도 내려온 것 같은데 공기가 달랐다. 서늘했고, 습했고, 먼지 냄새 같은 게 났다. 문 앞에 섰지만 예상과 달리 초인 종이 없었다. 집이라면 당연히 초인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벨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고동색의 얇은 철제문이었다. 초등학생인 내가 두드리는데도 철제문의 프레임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보낸 신호에 어떤 응답이 있을까 싶어 살짝 긴장됐다. 하지만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동수를 만나러 왔지만 그냥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왕 온 이상 한번 더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목소리가 계단에 부딪혀 울렸다.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렸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누구라도 오길 기다려야 할까 고민이 됐다. 이 집에 동수만 살았다면 일단 그냥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수네 아빠도 이곳에 살고 있었고 그와는 돚히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오래 기다려서 마주치는 게 동수네 아빠라면 차라리 지금 이곳을 떠나는 게 맞았다. 잠시 계단에 앉았다. 계단의 차가운 촉감을 엉덩이로 느꼈다. 일단 좀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기다리더라도 지상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시야에 지상이 보일 때쯤 주택 대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다시 두 계단을 내려가 바위 뒤에 매복한 군인처럼 몸을 굽히고 계단에 옆구리와 엉덩이를 붙여 기대었다. 대문 쪽에서는 내가 보일 수 없는 위치였다(라고 믿었다). 누가 오는지 확인해야 했다. 근데 대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들은 토요일의 그 악당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동수가 있었다. 계단에 대고 있는 손가락 끝 마디가 저릿저릿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의 딸꾹질처럼 속에서 어떤 호흡 한 덩어리가 기도를 통해 올라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빨과 턱에 힘을 줬다. 그리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다시 계단 밑으로 내려가야 했다. 가능성은 두 개 중에 하나였다. 지상 주택으로 들어가거나, 이곳으로 내려오거나 하는 것이었다. 다른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주 강한 예감으로 그들은 이곳으로 내려올 것 같았다. 동수가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더 컸다. 뒤꿈치를 최대한 들고 앞 꿈치로만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는 것 말고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동수 네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한번 더 문고리를 돌렸지만 여전히 잠긴 채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계단 근처까지 온 것 같았다. 역시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 대문을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실력 있는 도둑인 것 같았는데 지금은 곧 잡혀 수갑을 찰 것만 같았다. 그때 눈에 뜨인 게 계단 밑의 공간이었다. 시멘트 계단 밑으로는 계단을 따라 사선으로 떨어지는 공간이 있었는데 지하라 어두웠고 마침 먼지 쓰인 에어컨 실외기가 그곳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실외기가 계단 벽 쪽에 바짝 붙어 있지 않아 실외기와 계단 벽 사이로 내가 숨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일단 그곳에 들어갔다. 바닥에 정체 모를 물기가 고여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최대한 몸을 굽혀 구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들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계단을 통해 머리 위로 들렸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를 통해 머리에 울렸다. 계단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말소리와 귓가에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한데 모여 울렸다.
"요새는 사냥이 잘 안돼"
"네가 잘해야지 병신아"
"굉장히 배고프네"
말소리가 오갔다. 주말에 들었던 목소리일 텐데, 뭔가 낯설었다. 하긴 그때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건 대부분이 오락실 안에서였다. 오락 소리와 섞인 소리를 들었으니 제대로 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오가는 얘기 중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중에 동수의 목소리는 섞여 있지 않았다. 그들은 계단을 모두 내려온 것 같았다. 거리로만 보자면 그들과 나의 거리는 이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코로만 호흡을 하고, 몸을 최대한 더 오므렸다. 마치 이 구석과 하나가 되려는 듯 어둠 속에 더 깊이 숨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문에 달린 유리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는 경칩 쪽에서 녹슨 쇳소리가 났다. 소리로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상상했고,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는 확신을 했다. 근데 문제는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가고 문이 닫히며 회전하는 소리는 났지만 문고리가 완전히 닫혀 철컥하는 종료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진 않은 것이다. 일단 그들에게 걸리진 않았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 동안 나는 멎은 채로 있었다. 아직 걸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집중해서 들어보면 집 안에서 뭔가 말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잠시 웅성였다 사라질 뿐 어떤 말들인지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았다. 핀셋으로 머리카락을 집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두 팔로 땅을 짚고 네발로 에어컨 실외기 사이를 기었다. 순간 신발 옆창 고무가 실외기를 건드렸다. 금속판이 울리는 소리가 호수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공기 사이로 퍼져 나갔다. 동작을 멈추고 숨을 참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울림이 멎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이상 이곳에서의 일은 온전히 나만의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는 탈옥을 시도하는 수감자였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검정 먼지가 팔 옆면에 붙어있었다. 하필 오늘 흰색 티를 입고 있었다. 실외기 뒷면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실외기 옆면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고개를 살짝 꺼내 동수 네 현관의 동태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손 한 뼘 정도가 벌어진 채 열려 있었다. 눈으로 상황을 확인하자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보이지 않을 땐 두려움만 가득했는데 이제 눈으로 직접 관찰하게 되니 다시 한번 어떤 게임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비비탄 총싸움이나 경찰과 도둑, 뭐 그런 것들과 비슷했다. 나는 술래들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다. 비록 사대 일의 싸움이지만 상황은 나에게 유리했다. 술래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션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소리 내지 않고 현관 앞을 통과한 후 계단을 올라 대문을 빠져나간다. 이게 다였다. 걸리지 않는 게 목표였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게 관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놀이터에서 하는 일들이었다. 눈을 현관에서 떼지 않았다. 기회의 순간은 분명히 올 것이다. 지금이라도 뛰쳐나가도 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 했다. 조금 더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려야 했다. 현관이 완전히 방심하는 순간, 그 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 전력을 다해야 했다. 시선을 현관에 고정한 채로 다리를 풀었다. 몇 분을 쭈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다. 왼다리를 뒤로 뻗어 무릎을 굽혔다 폈고 발목을 돌렸다. 그다음은 오른 다리였다. 다리를 풀고는 어깨를 돌렸다. 어깨를 돌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몸의 마디마디가 준비가 완료 됐음을 알렸다. 현관은 나로부터 이 미터 앞에 있었다. 계단은 현관의 맞은편에 있었다. 나는 현관을 찍고 유턴해 계단으로 올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소리에 집중했다.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의 웅얼거림도 잦아든 상태였다. 계단 밑의 정적이 새벽안개처럼 나를 감쌌다. 동수네 현관 문고리에 지상의 햇빛이 반사됐다. 그게 반짝여 내 눈에 닿은 순간 나는 허리를 숙인 채 뒷 꿈치를 들고 돌진했다. 현관을 지나 다시 뒤쪽의 계단을 올랐다. 숨도 쉬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발을 헛디딜까 계단을 보며 두 칸씩 뛰었다. 지상의 빛이 나를 반겼다. 나의 탈옥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계단을 거의 올라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거실 바닥에서 바퀴벌레를 본 어느 여대생처럼 놀랐다. 하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소리는 배에서 나와 목에서 멈춰 버렸다. 다만 작은 탄식이 소리 대신 새어 나왔다. 계단의 끝에 그가 서 있었다. 동수 네 아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