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라는 게 탄생한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태어났는가? 원해서 삶을 시작했는가? 아니다.
원해서 학교를 들어갔는가? 우리 힘으로 살고 싶은 곳을 정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부터 시작하는 걸까?
우리의 힘이, 의지가 닿기 시작하는 건.
언제 무엇으로 시작했을까?
나는 저 우주를 보고, 그 답이 어렴풋이 느낌이 왔다.
태양계는 태양으로부터 나와 태양에너지로부터 에너지원을 받는다.
그래서 생명체의 조성환경의 기반에너지는 당연히 태양에너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양에너지가 아닌 다른 에너지로 내부 에너지가 구성된 천체가 있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태양에서 아주 먼 목성의 유로파라는 위성은 표면이 영하 160도에 해당하는 얼음으로 덮여있어 태양에너지가 닿지 않는 환경이지만 내부를 깊이 들어가 보면 얼음이 아닌 바다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목성의 다른 위성인 이오라는 위성에는 마찬가지로 태양에너지가 아주 적게 도달하지만 활화산만 400개 이상으로 활발한 화산 활동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그리고 분명 우리 삶에서 시작했는데 천체 이야기를 함께 했더니 닮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또 왜일까? 하나하나 또 풀어가 보려 한다.
우선 목성의 위성들이 태양에너지가 아닌 에너지를 가지는 이유는 '기조력' 때문이다. 중력과 중력의 충돌로 인해 마찰이 발생하는 것이다. 목성이라는 행성 자체의 중력 또 많은 위성들 각각이 가지는 중력에 의해 목성의 위성들을 자기들끼리 밀어냈다가 끌어당겼다 하는 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지층의 충돌로 발생한 열에너지가 이오의 화산으로, 유로파의 바다를 만들 수 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에너지를 기반으로 유로파에는 생명이나 생태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생긴다. 당연히 외부적 요인(태양)만이 생명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중력의 존재와 함께한 행성과 위성의 존재 때문에 태양에너지 없이도 생명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다시, 조금 진전된 우주이야기를 그대로 우리 삶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우리도 어떠한 중력을 만들어 내면, 그 중력 간의 작용으로 자체적인 에너지 원을 가져 외부적 요인 없이 내부적으로만 내 의지로만 선택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에서 진정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중력'이라는 것이 개인 단위에서는 역사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기록으로 인해 글, 사진, 물건, 소품, 가게, 문화, 사람 등등을 추억으로 만들고, 그 추억들을 마치 한 명의 역사가가 된 것처럼 배치한다면, 그것은 중력을 이루고, 고유한 에너지원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진 개인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라면 아무리 외부적 요인(사회)에서, 에너지를 주지 않더라도, 계속 상태를 유지하거나 발전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존감이라는 것도, 자신감이라는 것도. 많은 동기부여 연설가들이 말하듯. 더 사소하고, 더 많은 성공경험, 또는 더 많은 실패경험에서 온다고 하는 것도 사실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추억에 기록을 붙여야 한다. 흘러가는 추억은 중력을 만들지 못하고, 흩어지는 태양계 주변의 먼지가 될 뿐이다. 추억에 기록을 붙여 역사로 만들면 그것은 흩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내가 나아갈 때 한 걸음분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가 추억을 쌓는 이유는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목성과 지구와의 거리만 6억 2천만 km인데 지구의 개인이 겪는 이야기와 목성의 위성이 겪는 이야기가 비슷하고, 심지어는 위성이라는 천체인데 뭔가의 동질감 마저 든다는 게? 이런 이유는 왜일까.
사실 의미는 분할하기에 달려있다. 엉덩이는 한 쌍이냐 하나냐에 대한 논쟁처럼 의미는 분할하기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너무나 다르게 생기고, 심지어는 쓰임에서도 차이가 있는 우리의 코나 코끼리의 코나 분류된 의미에서는 같은 코라는 것도 비슷한 선상에 놓인 이야기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코라는 것은 얼굴이라는 범주에 속하고, 얼굴은 신체라는 범주에 속하며 신체라는 범주에 도달하면 미생물과의 비교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범주를 여행하면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이고, 다른 것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한 분류 안에서 고여있던 생각을 다른 분류에 같은 범주 선상에 놓고 비교하면서 고착된 생각을 깨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의 메인은 이게 아니고, 이건 그저 덤에 불과한 글이지만 이것이 공자가 죽기 전 한 번 더 읽기를 염원했던 주역의 기본이며, 현대 수학의 한계를 부수고 있는 위상수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가 존재했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건. 어느 분류에 특정하는 일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하게 바라보는 관점도 언젠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진 않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 글을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