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법의 시간
시간을 연구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의 향기가 넘쳐흐르지만 나는 과학자가 아니고, 과학을 제하고도 시간에 대해 말할 것들이 너무 많다. 우선, 시간에는 여러 기준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평소에 익숙한 정량적인 시간이 있다. 우주적 관점에 근거하여, 태양을 돌고,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이 기준도 측정에 따라 살짝 다를 수 있고, 기준을 다르게 잡을 수도 있기에, 지구에는 여러 믿음에 따라 각자의 사상이 깃든 달력들도 존재한다. 단순하게 태양력과 태음력이 아닌, 그레고리력, 율리우스력, 이슬람력, 불교력, 우리나라의 음력 등등 교황이나 종교, 왕들로부터 기원한 수많은 기준이 있다.
이렇게 많은 기준을 처음에 말한 한 카테고리로 묶으면 정량적인 시간이다. 사상이나 종교, 정치 구조에 기원한 달력이 있는 것도, 이러한 시간에 대한 기준이 한 문화권 내에서 약속처럼 함께 사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시간을 나눈 약속을 하고, 그 틀어지지 않는 그 약속에 기반해서 일정을 맞춰보고, 함께 교류를 하고, 사회라는 것을 문제없이 굴러가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시간을 쓰기 위해 만들어낸 해석법 중 하나에 불과한데, 대부분은 지금 사용하는 시간이 정량적으로 계산해 정한 약속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양이라는 한 면만 보고 판단하게 되는 문제를 만난다.
당연히 시간은 단순하게 양적이지 않아서 이러한 문제를 만나면 우리는 평소 개념에 없는 것이기에 쉽게 생각을 전환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시간을 양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시간을 양적으로 보는 개념과 시간을 질적으로 바라보는 개념이 공존했고, 각각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고 불렀다.
질적인 개념인 카이로스 시간 내에서는 물리적인 1분이더라도, 누구와 보내는지 무얼 하고 보내는지를 중요시 여긴다. 아마 글을 읽는 모두가 아니 그냥 모든 사람들은 그걸 느끼면서 살 것이다. 내가 어떤 이와 시간을 보낼 때 더 시간이 아깝지 않고, 같은 시간을 보내도 기꺼이 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같은 시간 내에 어떤 일을 하고 얼마나 집중하는지에 따라 일의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바로 그것 물리적 시간을 넘은 기준을 카이로스 시간이라고 본다.
물리적으로 정량적으로 끊어 둔 시간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틀어질 일이 없다. 물론 아주 미세하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같은 문화권 내에서는 약속으로 하나의 기준을 정해두기 때문에 거기에 장점이 있다. 반대로 질적인 시간은 기준이 우리 내부에 있다. 얼마나 집중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지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에 가까운 것, 속한 것으로 판단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을 이해한다면, 시간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면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면을 더 추가해보고자 한다. 어쩌면 정량적이면서도 내부적인 그런 시간의 기준이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1에서 0으로 가는. 시간이란 생과 사의 사이이다. 문학적으로는 생에서 사의 여정을 하나의 시간 덩어리로 바라보는 관점을 생각해 보았다.
컴퓨터라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기저에 들어가 컴퓨터가 구성된 원리들을 뜯어볼 시간이 꽤 있었다.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컴퓨터 관련해서 교육기관에 열심히 다녀보고 많은 공부들을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여러분께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인 이 복잡한 컴퓨터가 뜯어보면 그저 0과 1의 무수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0과 1이라는 하나의 면으로 또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설명하면 꺼짐과 켜짐이다. 0은 신호를 껐다는 표시이고, 1은 신호를 켰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4개 연속 붙어있는데 4개를 다 키면 어떤 의미가 있고, 3개를 켜면 어떤 의미가 있고, 이런 규칙을 엄청 크게 가져가서 이 컴퓨터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뷰로 나는 시간을 보았다. 지극히 내부적이라는 말은 개인의 인생에 그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시간의 총량이 시작하는 때, 0과 1이라고 치면 1, 켜짐이 곧 탄생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는다. 그것은 곧 0 꺼짐을 의미한다. 어떤 시간대에 있건, 사람은 태어나고, 죽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단어를 뜯어보면 이 기준이 좀 더 와닿는다. 시간이란 시점과 시점 사이의 순간이다. 즉 두 지점의 사이다. 그렇게 보면 1과 0의 사이를 하나의 시간의 기준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봐야만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외부적인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겐 당신의 시계가 가고 있다. 시간은 과학을 넘어 동시에 약속의 수단이다. 그런데 정량적인 약속과 질적인 약속 아래에서 인간은 다 다른 시간을 사용한다. 따라서 이 기준들에서의 노하우는 연결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1과 0이라는 시간의 기준, 생에서 사라는 것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그 기준하에서 판단한 것들에 대한 노하우는 반드시 공유되고 전승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노하우마저도, 더 내부적인 요인들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생에서 사까지의 여정이라는 한 카테고리로 묶여있다면, 그 관점으로 세상을 한 번 더 다시 바라보는 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1에서 0이라는 것은 무언가 이룬다는 개념마저도 지워버리고, 그저 모든 삶의 순간을 과정으로 바라보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어떤 한 일을 하다가 죽었더라면 미완이 아니고, 그것이 모두 이어진 하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즉 그것이 자체로 완성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