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주기로 순환한다.
요즘.. 이 무더위에 나는 어떠한 것도 제대로 하기가 힘들고, 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여름만 되면 그랬던 것 같다. 따듯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땀이 나기 시작하고, 피부가 타는 모습을 보기 시작하면, 몸이 자연스레 나가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온도도 중요하다. 점심때쯤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퍼져있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무섭게 집중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지금 이 글도, 너무 더워서 깨버린 칠흑 같은 한밤중에 겨우 몸을 일으켜 쓰고 있다. 어쩌면 나만 느끼는 것인가 싶지만 세상에는 시에스타나 서머타임 같은 더위를 피하는 무언가가 이미 존재하기도 한다. 그걸 보고는 은연중에 이 더위를 느껴오고, 피해온 문화도 있구나 싶다.
더위와 함께 집중력을 잃는 이야기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았다. 이걸 과학적으로 딥하게 풀어내고, 뭐 그런 생각은 없다. 그저 이것을 촉매 삼아 '주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다.
나는 개인의 삶과 세상의 환경이 주기로 순환한다고 생각한다. 주기로 순환하며 우상향. 주기로 순환하며 우하향. 그리고 사라짐. 그리고 태어남.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삶에 대해 먼저 보면, 썸머에러처럼 집중이 잘 되는 시기와 집중이 안 되는 시기가 있다. 또한 피곤한 시기와 덜 피곤한 시기도 있고, 감기에 걸려도 코가 잘 막히는 시기와 잘 뚫리는 시기가 비주기로 나누어져 있다. 또 운동을 할 때는 어떠한가? 근력이 느는 시기가 있으며, 스킬이 느는 시기가 있으며, 마인드가 성장하는 시기가 있으며, 어떤 때는 부상을 당해 전혀 운동을 하지 못하면서도 안전하게 운동하고자 다짐하고, 놓쳐온 것들을 인식하는 시기도 생긴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운동이 잘해지며 또한 특정 주기에 따라 고점과 저점이 반복된다.
어떤 야구선수는 여름엔 너무 효율이 안 좋지만 가을이 되면 날개가 달린 듯 날아다니고, 표면적으로는 4년 운동을 시작한 시간을 기준으로 잡으면 10년 이상이 될 수 있는 올림픽 스타들은 이미 개인적인 기록으로 올림픽 금메달 기록을 세웠지만 막상 올림픽 당일엔 그 기록을 세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최근 진행한 올림픽 역도 종목에서 예심 기록을 그대로만 들어도 메달권이던 선수는 예심기록만큼도 들지 못했다.
이런 일련에 사건들이 모두 '주기'라는 하나의 범주적인 원인으로 설명될 수는 없지만 모든 사건들이 '주기'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주기'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고 싶었고, 지금 떠오르는 여러 경우들을 묶어보고 싶었다. 원 없이 생각나는 경우를 더 써보고 마치려 한다. 모든 것이 주기와 관련이 있다.
주기 그 자체인 분야도 있다. 바로 패션이 그렇다. 주기가 없다면 패션도 없고, 유행도 없다. 또한 역사가 실존하고 현재까지 모든 문명들을 보아도, 패자는 늘 바뀌어왔다. 따라서 나는 아무리 워렌버핏이 미국의 반대에 베팅하지 말라고 해도, 늘 일말의 의심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또한 운동 방식도 매일 같은 것을 훈련하는 방식은 비선호한다. 특정 주기에 맞게, 스킬에 맞게 유연성을 목표로 하다가 안정성을 목표로 하다가 스트렝스를 목표로 하다가 순간적인 스피드를 목표로 하다가 기교를 목표로 하다가 또 어느 날엔 다시 유연성을 목표로 잡을 수도 있다. 운동도 변화할 것이다. 1년은 역도를 하고, 1년은 요가를 하고, 1년은 크로스핏을 하고, 다음 1년은 맨몸운동을 하고..
책을 많이 읽고, 정리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시기가 있으면, 다시 책을 적게 읽고, 하나가 떠오르면 바로 실행하는 시기가 있고, 혹은 책을 더 읽기보다 하나 더 실행해 보고, 조금 더 오래 유지해 보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도 존재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사례지만 모두 다 '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주기는 존재하되, 통제하지 못한다. 마치 불가리안 백스윙이나 농구 드리블 같이 파도 같은 성격을 지녀서, 그 시작이 나일지라도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그저 흐름을 인식하고 버텨내고, 일말의 힘을 더하여 방향을 조금은 틀어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주기는 이러한 개인적인 작은 단위의 주기와는 또 다르다. 개인적인 주기에는 '나'라는 시작점이 존재했지만 세상의 주기는 이미 그 시작점조차 모호해져 있다. 그저 파도이며 파도 같은 것들이다. 파도라는 설명은 이 주제를 말하기에 너무 딱 맞는 단어다. 애초에 파도가 주기이다. 계절과 온도, 그리고 강수에 따라 파도는 더 깊게 길게 약하게 얕게 강하게 높게 짧게 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서 무언가 새로운 파도를 보여주진 않는다. 무언가 새로운 파도가 있다면, 그것은 오랜 주기를 끝내는 다음 주기의 파도 형태 거나 혹은 파도를 맡는 쪽의 상황이 변화한 결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거다. 파도가 부딪치는 모래사장이 개간지가 되어서 더 이상 모래가 아닌 방파제에 부딪혀야 한다거나. 오랜 세월을 견뎌오던 바위층이 이제는 파도에 다 부서져 버려 모래층만 남게 된다거나 하는 경우일 것이다.
사실 자연적으로 보았을 때, 개인적인 것과는 또 다르게 상승과 하강, 긍정과 부정의 부분을 잘 확인하기 어렵다. 바위층이 사라지고, 모래층이 남은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누가 그렇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냐에 따라 그것은 달라지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나'라는 주체가 있었기에 해당 기준이 조금은 더 명확할 수 있었다.
여름에 덥고, 태풍이 발생하고, 장마가 오고, 이런 것들은 지구에겐 필요하거나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저 존재하고, 주기에 맞게 바통을 넘겨준다. 따라서 우리는 애초에 무언가를 통제하는 류의 종이 아니라. 적응하는 류의 종인 것이다. 어쩌면 바퀴벌레와 호각을 다툴만한 적응력을 지녀서 이 지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콧방귀 좀 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콧방귀는 모두 통제보다는 적응에서 왔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