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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May 03. 2021

왕손이와 왕발이

간편소설 열여덟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왕손이와 왕발이의 눈에 신기루처럼 육지가 떠올랐다. 가물거리는 구원의 표적을 향해서 왕손이는 야구 글러브 같은 손으로 물을 젓고, 왕발이는 자이언트그루퍼의 꼬리 같은 발로 물을 찼다. 그렇게 손발을 맞춰 자신들이 탄 쪽배를 육지로 쑥쑥 밀어갔다.


마침내 가닿은 육지는 손바닥 부족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거기서는 손으로 하는 작업들이 중시되고, 주식인 밤톨로 하는 공기놀이가 부족 차원의 스포츠로 대접받고 있었다. 밤톨 다섯 개뿐 아니라 예닐곱 개도 거뜬히 가지고 놀 수 있는 글러브 손 덕분에 왕손이는 금세 스타가 되었다. 반면, 그저 그런 손을 가진 왕발이는 공기놀이에서 밀려나 밤나무 농장의 일꾼이 되었다. 농장에서 받는 일당은 밤톨 열 개였다. 배가 고팠던 왕발이는 하루에 밤톨 백 개를 버는 왕손이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자네도 참 딱하군. 손재주 키웠으면 좋으련만.”


황금 장갑을 낀 손으로 왕발이의 갈라진 손을 쓱 문지른 왕손이는 창고에서 커다란 자루 하나를 꺼내왔다. 자루를 둘러멘 왕발이는 기쁜 맘으로 귀가했다. 하지만 자루에 담긴 밤톨들을 확인하자마자 욕설을 날렸다. 죄다 썩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왕발이가 왕손이를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열 번의 밤 수확기가 지나갔다. 그리고 발바닥 부족이 쳐들어와서 손바닥 부족을 찍어 눌렀다.


바야흐로 발로 하는 작업들이 중시되고, 밤톨로 만든 제기를 차는 게 부족의 스포츠로 떠올랐다. 여러 개의 제기를 동시에 찰 수도 있는 꼬리 발 덕분에 왕발이는 벼락 스타가 되었다. 반면, 그저 그런 발을 가진 왕손이는 제기차기에서 밀려나 창고의 밤톨을 탕진하고는 밤나무 농장의 일꾼이 되었다. 그러다 하루는 왕발이를 찾아갔다.


“세상이 바뀌니 자네도 별수 없군. 이제라도 발재주를 키워보지그래.”


신고 있는 황금 신발로 왕손이의 낡은 신발을 툭 건드린 왕발이는 창고에서 커다란 자루 하나를 내왔다. 자루 안에 온통 밤껍질만 담긴 걸 본 왕손이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열 번의 밤 수확기가 지나도록 왕발이를 찾지 않았다. 둘이 만나게 된 건 이빨 부족의 침략으로 또다시 바뀐 세상을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스산한 맘으로 바닷가를 거닐던 왕손이는 쓰러진 나무에 앉아 있는 왕발이를 보았다.


왕손이는 왕발이와 떨어져 앉아 있다가 밤톨을 꺼내 먹었다. 옆에서 왕발이가 침을 삼켰다. 창고의 밤톨들은 ‘이빨로 밤껍질 까기’ 놀이에서 밀려난 그저 그런 이빨로 다 까먹은 터였다. 고맙게도 왕손이가 밤톨 하나를 건넸다. 부실한 식사 후 반짝이는 수평선을 그윽이 바라보던 둘의 눈이 한순간 마주쳤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바닥에 쓰러진 나무들을 모아 밧줄로 엮기 시작했다. 이윽고는 물을 젓고 차면서 파도의 벽을 넘어 자신들이 탄 뗏목을 밀어갔다. 그 옛날처손발을 맞춰, 수평선으로, 쑥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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