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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May 10. 2021

내 집 천장 위에서 드리프트

간편소설 열아홉

“빨리, 빨리이!”


또 시작이다. 1010호. 사나흘에 한 번씩은 저리 난리블루스니. 것도 밤 11시가 넘어서. 경비실에 말해도 소용없고. 자정까진 계속 저럴 텐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오냐, 내 오늘은…… 위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누른다. 반응이 없다. 또 누른다. 마찬가지. 다시 누른다. 그제야


“어서 오세요.”


이 무슨 신박한 반응? 문을 열어줘야 오시든 가시든 하지. 이마를 긁적이다가 손잡이를 당기니 문이 열린다. 소음과 술내가 애완견처럼 달려든다. 거실 쪽 소파에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이 집 주인장이 보인다. 그 앞 평상 위에는 주인장의 아들로 뵈는 청년이 앉아 있다. 손짓하는 청년 옆으로 주뼛주뼛, 가서 앉는다. 모두가 전방 티브이를 향해 앉은 상태에서 운전 자세를 취한 청년. 기어 넣고 액셀 밟는다.


차가 출발한다. 아니, 거실과 방이, 그러니까 1010호 구조물이 움직인다. 도대체 이게 뭔 시추에이션? 해석도 설명도 안 되는 가운데, 뒤에서 외치는 주문대로 구조물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레고 조각처럼 아파트 동 건물에서 분리된 1010호는 허공을 달린다. 전방 시야는 티브이로, 측방 시야는 거실 창으로 확보한 채.


이미 허공에는 수많은 구조물들이 질주 중이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든다. 그리고 레이스. 상하좌우로 파고들어 앞의 구조물을 추월하고 같은 방식으로 뒤의 구조물에 추월당하는 모습이 티브이 화면에 펼쳐진다. 레이싱 게임보다 더한 긴박감이 심장을 난타한다.


아찔한 접전에 질려 고개를 돌리니 살풍경한 장면들이 거실 창밖에 즐비하다. 아래윗집이 붙은 구조물들. 한쪽에선 아이들이 뛰고, 피아노 치고, 청소기 돌리고, 문 쾅쾅 닫고, 고성방가하고, 벽에 못질하고, 다른 쪽에선 귀 막고, 인터폰 하고, 대걸레로 천장 찍고, 올라가서 따지고, 멱살 잡고, 주먹다짐하고. 그도 모자라서 칼부림하고, 심지어 불 지르는 구조물까지 보인다.


떨어져서는 속도전으로 뜨겁고, 붙어서는 프라이버시 침해로 뜨겁다. 숨 막힐 정도로 가까운 앞과 뒤, 위와 아래의 공간에서 모두가 투쟁심으로 뜨겁다. 허공을 가르는 구조물들의 은하수. 그 뜨겁고 거대한 난장 속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지침인양 “빨리빨리”만을 외쳐대는 주인장과 속도를 올리며 추월을 거듭하는 청년.


그 때문에 점점 뒤로 젖혀지던 몸이 한순간 옆으로 확 쏠린다. 곧바로 거실 창밖으로 튕겨져 나간 나는 저만치 창이 열린 어느 집 안으로 빨린 듯이 들어간다. 이제 막 스릴 만점의 드리프트로 아파트 동 건물과 결합한 레고 조각, 1010호의 아랫집 거실에서 나는 비실비실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싱크대로 가서 속엣것을 왈칵 토한다. 방금 전에 끝낸 은하수 일주가 만족스러운지 윗집 주인장은 조용하다. 바야흐로 편안하게 휴식할 일만 남은 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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