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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Apr 26. 2021

세일즈맨의 죽임

간편소설 열일곱

저이는 왜 나를 자기 친구로 착각하는 거지? 초등학교 동창? 거의 30년 만이라고? 그럼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겠군.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득달같이 나와서 반긴 걸 보면 친구가 오기로 한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할까, 수도꼭지를 팔러 왔다고? 아, 아니지. 오늘 몇 집을 허탕 쳤는데. 내가 일부러 속이려고 한 것도 아니고, 저이 친구가 오기 전에 얼른 팔고 나가면 되지, 뭐!


가구들이 전부 값비싼 거네. 부럽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살 수 있는 거지? 마침 알아서 답을 해주시는군. 하긴 동창 만나서 자기 돈 번 자랑부터 해야 직성이 풀리는 속물들은 쌔고 쌨으니까. 음, 경매로 나온 집들을 헐값에 사서 살짝 손본 뒤에 비싸게 판다고. 그러니까 집장사해서 부자가 됐다는 얘기네. 난 밀린 대출 이자 때문에 매일 똥줄이 타는데, 세상 참 엿 같군.


이러나저러나 어서 수도꼭지나 팔고 가자고. 잘하면 여분도 사줄 것 같은데. 어라, 공공칠가방은 왜 가져오지? 헐, 이게 뭐야? 돈이잖아. 10만 불? 일단 이것만 맡겨 보겠다고? 친구가 뭐하는데 이런 거금을 맡겨? 종목이니 수익률이니 하는 걸 보니 주식? 역시 그렇군. 잘나가는 주식중개인이라. 옛날엔 코찔찔이에 말더듬이라서 엄청 놀렸는데 말이지.


생각나네. 존 그 개자식. 날 지긋지긋하게도 괴롭혔지. 지금은 뭘 하나 몰라. 저 인간처럼 부자로 살까? 생각만 해도 기분 더럽네. 이 망할 놈의 세상은 돼먹지 않은 새끼들일수록 더 잘산다 말이지.


목이 타는군. 저기 주방으로 가서 물 좀 마셔야겠다. 주방 기구들도 으리으리하고, 이런, 수도꼭지도 황금색이네. 도금이겠지? 응? 수, 순금이라고? 애고, 여기서도 수도꼭지 파는 건 나가릴세. 냉수 먹고 속 차려야겠지? 그래, 황금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맛은 어떤지나 보고 가자고.


근데 하…… 좀 전 얘긴 안 들었어야 하는데…… 며칠 전에 수도꼭지를 팔러온 놈이 있었다고? 녹 안 스는 최신 재질이니 뭐니 하며 쓰레기 같은 물건을 내밀었단 말이지? 그래서 주방을 보여줬더니 개새끼처럼 꼬리를 말고 내빼더라?


이 자식 이거, 저보다 약한 친구나 괴롭히던 싹수 노란 새끼가, 빚에 눌리고 이자에 치어 사는 나 같은 사람들한테서 압류한 집 가지고 배불리는 이기적인 새끼가, 뭐라고? 하, 손이 부들거려서…… 카, 칼이…… 그래, 여깄군.


날 원망하진 마라. 이건 다 네 더러운 입이 자초한 결과니까. 아니, 남들의 피눈물 위에서 재산을 불려온 네 뻔뻔한 삶에 합당한 결말이니까. 그리고 이 10만 불은 네가 저지른 과오에 부과된 벌금이라고 생각하셔. 난 세상의 약자들을 대표해서 벌금을 징수해 가는 거고 말이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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